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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해적’ 손예진, “주인공 이모나 친구역 할 때가 되면…”
엔터테인먼트| 2014-08-04 08:53
[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여월’은 아버지도 해적이었죠. 남자들 사이에서 외롭고 고독하게 자랐을 것 같아요.” 손예진이 ‘해적’에서 맡은 역할을 소개하는 데 문득 그녀의 독백 같은 착각이 들었다.

손예진은 스물하나 나이에 ‘연애소설’(2002)로 주목받기 시작해, ‘클래식’(2003),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를 거치며 한국영화계를 이끌 여배우로 자리잡았다. 드라마 ‘연애시대’(2006)를 통해 아름다운 외모에 가려졌던 연기력까지 인정받았다. 그러면서도 ‘청순미의 대명사’라는 틀에 갇히지 않기 위해 코미디(‘작업의 정석’)부터 범죄액션물(‘무방비도시’), 미스터리 스릴러(‘백야행’, ‘공범’)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작품의 성격은 천차만별이었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손예진이 늘 ‘원톱’ 혹은 ‘투톱’으로 고군분투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비중이 절대적인 작품을 통해 연기에 대한 갈증은 마음껏 풀 수 있었다. 다만 손예진의 ‘이름값’으로 작품들이 화제가 되다보니, 현장을 즐기기보다 부담감에 짓눌릴 때가 많았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주위 풍경에 시선을 주지 못한 채 지난 10년을 달려왔다.

그랬던 손예진이 달라졌다. 나홀로 극을 이끄는 부담감을 한번쯤 떨쳐내고 싶어 적은 비중에도 ‘타워’(2012)를 선택했다. 그 경험은 만족스러웠다. 당시 선·후배들과 어울리며 현장을 즐겼던 기억이 이번엔 그녀를 ‘해적’ 앞에 데려다놨다. 그렇게 손예진은 다른 배우들과 어울려 연기하는 ‘맛’을 뒤늦게 알아가는 중이다. “촬영 끝나고 맥주 한 잔 하는 낙”도 달콤하다. 최근 인터뷰에서 만난 손예진은 한결 여유로운 미소로 반짝였다.


#1. “귀한 분께서 이 험한 바다까지 어인 일이신지요?” -여월이 국새를 찾기위해 자신을 찾아온 야심가 ‘모흥갑’에게

지난해 손예진이 KBS 드라마 ‘상어’를 끝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적’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산적과 해적이 만나고, 고래가 국새를 삼키는 등 참신한 설정에 구미가 당겼다. 아직까지 국내 어드벤처물이 ‘인디아나 존스’처럼 매끈하게 나오기 힘든데, ‘해적’이라면 탄탄한 스토리와 볼거리 둘 다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끝나고 바로 들어가야 해서 고민이었죠. 체력적 한계 때문에 민폐를 끼지치 않을까 걱정됐어요. 여배우들 액션은 그럴싸하게 흉내내면 된다고들 하지만, 어설픈 모습을 보인다면 제 스스로 용납이 안 될 것 같았죠.”

캐릭터에 대한 고민도 불쑥 고개를 들었다. 한국판 ‘여자 해적’이라니 어디서 뭘 참고해야 할 지 모를만큼 생소했다. ‘여월’ 캐릭터를 스스로 머리에 그려보는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동양적인 외모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어요. 사극톤 대사지만 여성스럽기보다 카리스마 있어야 했죠. 눈빛 하나부터 말투 하나까지 다 어려웠어요.”

물론 출연을 결심하는 데는 한 가지 이유면 충분했다.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았죠.” 


#2.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해적이다.” -해적단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소녀 흑묘를 향해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하기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액션 연기에 앞서 ‘낙법’부터 배워야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액션 초짜’ 손예진은 곧장 스파르타식 특훈에 들어갔다. 칼 휘두르는 게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꽤나 무거워 몇 번 휘두르다 보면 손목이 뻐근해진다. 그렇다고 가짜 칼로 연습하면, 실전에서 느낌이 달라지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고통을 참고 견디는 수 밖에 없었다.

액션도 액션이지만, 한겨울에 해상신을 촬영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실제로 ‘해적’을 보면 대사하는 손예진의 입에서 입김이 나올 정도다. 물론 주·조연보다 고생한 건 늘 한 박자 먼저 대기해야했던 단역 배우들이었다. “민머리 보조출연자 분들이 맨몸에 조끼 하나 입고 있는데 멀리서 봐도 닭살이 보일 정도였어요. 그 분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는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제가 주인공인데 춥다고 몸사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3. “해적의 마지막 길은 두 가지 밖에 없다. 물고기 밥이 되든가 용이 되어 부활하든가.” -소마의 반격에 무너진 여월이 바다에 몸을 던지면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스타에게, 전성기 이후를 상상해보라는 건 가혹한 일이다. “물고기 밥이 되든가 용이 되어 부활하든가” 둘 중 하나라던 ‘해적’의 삶과 마찬가지로, 배우 인생의 마지막 장에도 두 가지 길이 있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며 스스로 무대를 떠나거나, 세월의 흐름을 인정하고 작은 역할이나마 여전히 배우로 살아가거나. 손예진은 너무나도 담담하게 후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도 마흔이 되고, 결혼이라는 걸 하고, 멜로물 주인공보다는 누군가의 이모나 친구 역할이 자연스러워지겠죠. 현장에서 내 자리가 밀려나는 게 조금 씁쓸할 수는 있지만 이미 선배들은 다 거친 과정이잖아요. 오히려 그 때쯤 되면 결과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내 일을 사랑하면서 연기할 수 있겠죠. 어쩌면 배우라는 직업은 나이가 들 수록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ham@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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