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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쏟아진 여름날…책장 넘기는 소리
라이프| 2018-06-22 11:04
“100번 버스는 아르젠티나 광장 앞도 지나갔다. 버스 정거장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이 이 도시에서 가장 크다는 서점이었다. 그녀가 읽어낼 수 있는 책들은 한 권도 없었지만 B가 여기 와서 읽었을 만한 책들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지나갔다.”(조경란의‘ 매일 건강과 시’에서)
불안한 오늘…막막한 내일의 삶…
역사속 의문의 사건 다룬 스릴러
국가 주도 출산·육아 비판 내용도

섬세하고 탄탄하게 이야기를 직조해내는 소설가들이 돌아왔다. 내면의 갈피를 조심스럽게 들춰내 그 미세한 흔들림을 보여주는데 능란한 조경란, 굵직한 서사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김별아와 김탁환,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쓴 낯선 이야기들로 우리의 무감각을 일깨워온 구병모와 김금희의 소설이 나란히 나왔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두고 서점가가 서서히 달궈지는 모양새다.

조경란의 소설집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문학과지성사)는 ‘일요일의 철학’ 이후 5년 만이다.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는 이번 소설집에는 답답하고 정처없어 보이는 주인공들이 주로 등장한다. 불안이 나날이 된 이들에게 내일이란 단어는 사치일 뿐, 겉으로나마 아무 일 없이 하루 하루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불안하지도 않고 거리낌도 없는 기분이 드는 하루를 가져보는게 소원”인 일상에 자의적 타의적으로 작은 균열이 생기는 것으로 소설들은 시작된다.

단편 소설 ‘11월30일’의 훈은 휴학한 상태다. 학비도 없고 내일도 기약할 수 없는 그는 지하철역 입구에서 미키마우스 탈을 쓰고 어학원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 불안하고 한편으론 어떤 일이 주어질까 봐 두려운 마음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이다. 동생의 죽음으로 말까지 더듬게 된 그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한 농장을 찾는다. 농장의 아주머니가 훈이 가족과 어떤 관계인지, 엄마가 꼭 받아오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훈은 달걀 두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탄다. 마침 광화문 광장의 집회로 환승하지 못하고 떠밀리듯 무리에 섞인 훈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열심히 “지금 여기를 통과”하는데 집중한다. 그것도 달걀판을 껴안고 위태로운 상태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서울역 환승센터까지 걸어낸다. 그리고 훈은 소리내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오, 오늘이 말해주고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는 내, 내 내일이 말하게 하라”고 소리친다.

또 다른 소설 ‘매일 건강과 시’의 그녀는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하며 마흔을 앞둔 어느 날, 이탈리아 출신의 시인이자 강사인 B의 흔적을 찾아 그가 살았던, 그리고 참사를 당한 도시로 떠난다. 한 번도 살던 곳을 떠난 적 없는 그녀에게 B의 죽음은 탈출의 빌미를 제공한다. B는 그녀에게 다다르고 싶은 시로 통하는 문이었다. 한 달간 이국의 낯선 도시의 광장과 서점을 오가며 B의 흔적을 밟아가는 그녀의 속에는 말이 쌓여가고 응축된다.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비, 바람, 햇빛/오늘 같은 날/절벽의 집들은 빛나고/내일보다 젊은 이 순간’이란 몇개의 문장을 끄적이며 시의 언저리에 가 닿길 희망한다. 내내 답답한 안개에 갇힌 채 그저 열심히 걷다보니 길 같은 게 조금 보이는 것도 같은 소설들이다.

김금희의 첫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은 유쾌하게 시작할 수 있는 소설이다. ‘성석제류의 인물들’, 말하자면 한심해 보이는 인물이 악착스런 현실과 동떨어진 행동을 보일 때의 이격이 불러일으키는 웃음과 씁쓸함, 그리고 동정과 지지의 감정이 생기는 건 즐겁다.

무대는 ‘반도미싱’, 공상수는 이 회사 영업부 팀장대리다. 눈물 많은 상수의 영업전략 역시 감성적 접근, 이를테면 미싱 대신 실꾸러미를 들고 다니며 아날로그의 힘을 강조하는 전략이다. 띨띨한 그를 직원들은 ‘따’시키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이진 못하는데, 상수의 부친이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회장과 친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팀원 하나 없는 상수의 팀에 ‘문제 직원’ 경애가 배치된다.

소설에는 상처 입은 이들이 주류를 이룬다. 상수와 경애는 물론 경애의 엄마. 경애의 친구인 일영과 미유, 조선생, 반도미싱의 팀장 김유정까지, 이들은 이별과 죽음, 냉대와 굴욕의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고 꿋꿋이 견뎌낸다. 그런 와중에 서로를 통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경애(敬愛)’의 마음을 배워나가면서 스스로 단단해져 간다.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은 곤두박질치는 출생률을 높여보려는 각종 정책과 공동체의 허상을 신랄하게 파고든다. 경기도 외곽에 정부가 싸게 제공하는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은 입주 경쟁률이 치열하다. 자격도 몹시 까다롭다. 두 자녀 이상, 부부 중 한 사람만 직장에 다녀야 우대를 받는다. 입주 부부는 10년 안에 자녀 셋을 달성해야 한다. 프리랜서 그림책 삽화 작가인 효내는 한시도 눈을 뗄수 없는 17개월된 다림이를 앞에 두고 그림 작업을 하는 처지다. 제대로 마감을 지키지 못해 밤새는 일이 허다한 그녀에게 분리수거 뒷처리 등 공동규약을 꼬박 꼬박 지킨다는 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그런 사정을 알지만 두 아이를 키워본 단희의 입장에선 효내의 태도가 거슬린다. 새로 공동주택에 이주하게 된 요진은 서울의 큰 병원건물내 약국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고, 남편 은오가 대신 육아를 맡고 있다. 그렇다고 요진이 육아부담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수시로 아이의 양말이며, 간식. 어린이 치약 등이 어디 있는지 물어오는 은오에게 시달린다. 공동주택 네 가구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누군가의 제안으로 공동육아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상과 현실은 크게 어긋나게 된다.

소설은 이 공동주택의 뒤뜰에 놓인 식탁의 묘사에서 시작한다. 입주자 대부분이 앉을 수 있는 근사한 핸드메이드 식탁이다. 입주자들이 담소와 함께 즐거운 식사를 하는 풍경을 떠올릴 법하지만 분위기는 편치 않다. 일상을 나누며 허물없이 지내길 바라는 쪽과 그럴 처지가 안돼는 쪽, 공동체와 넘지 말아야 할 선 등 미묘한 가치들이 매끈한 식탁 아래서 부딪히면서 파열음이 난다. 의심없이 쓰는 따뜻한 공동체라는 단어의 서늘한 구석을 작가는 집요하게 드러낸다.

이 외에도 소설가 김탁환은 무소유의 삶으로 일관한 거지 광대 달문의 이야기인 역사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로 돌아왔으며, 김별아는 조선 효종 때 도성 한복판에서 벌어진 의문의 사건에 상상력을 입힌 장편소설 ‘구월의 살인’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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