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라이프칼럼] 노인의 집짓기와 건축적폐
뉴스종합| 2020-10-13 11:38

수십년 동안 서울 종로에서 살아온 80대 A씨(여)는 요즘 시름에 잠겨 있다. 그는 몇년 전 화재로 탄 집터에 지난해 9월부터 작은 한옥을 지어왔다. 예정일보다 늦어졌지만 외관상 공사는 올 4월에 얼추 끝났다.

A씨는 새 보금자리로 입주할 꿈에 잔뜩 부풀었다. 하지만 철석같이 믿었던 시공업자가 마무리 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나 몰라라’ 하는 바람에 착공한 지 1년2개월이 된 지금까지 정식 입주를 못 하고 있다.

건축 문외한인 A씨는 거동마저 불편해 처음부터 지방자치단체에 거의 의존했다. 실제 적지 않은 행정의 도움을 받았다. 이를 통해 서울시 한옥지원사업을 활용한 한옥(재축)을 짓기로 하고, 건축사·시공자와 계약한 뒤 공사를 진행했다. 이처럼 A씨의 집짓기는 줄곧 행정에 의탁해 길을 물었고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결과는 부정적이다.

서울시 한옥지원사업은 까다로운 심의 및 인허가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서울시는 (예비) 건축주가 선택·결정을 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각종 상담은 물론 필요한 경우 직접 펴낸 ‘한옥건축안내서’와 건축사·시공자·기술자 목록 등을 제공한다. (예비) 건축주로서는 고마운 행정 서비스인 것만은 분명하다. A씨가 계약한 건축사와 시공자도 물론 책자와 목록에 소개돼 있다.

그러나 행정을 믿고 시작한 80대 노인의 집짓기 과정은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와 직·간접적인 경제적 피해의 연속이었다. 건축사는 자치구의 사전 심의 절차가 완료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A씨에게 서둘러 자신이 소개한 시공자와 계약하고 계약금을 지불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이후 자치구 심의에서 ‘재심’ 결정이 나자 “이젠 건축주의 몫”이라면서 무책임하게 발을 빼버렸다. 해약조차 불가능하게 건축주와 시공자를 엮어놓고서는 말이다. 시공자로부터 소개료를 받아 챙기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설상가상 그렇게 만난 시공자는 더 나빴다. 그는 A씨와의 첫 대면에서 자신이 쓴 한옥건축 관련 책을 선물하며 은연중에 전문성을 과시했다. 그는 서울시 운영 한옥교실의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서울시 ‘한옥건축안내서’에는 A씨가 계약한 건축사와 시공자가 쓴 글도 들어있다.

하지만 막상 공사에 들어가자 시공자는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A씨로부터 공사 잔금은 물론 준공 후 하자 보수를 위해 남기기로 한 보증금까지 받아 챙겼다. 심지어 그는 건축주가 선지급한 공사대금을 번번이 다른 곳에 유용했다.

결국 A씨가 각서까지 받았지만 그의 대금 유용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견적 또한 부풀려진 것으로 드러났고, 애초 제시한 상세 공사 내용과 마감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시공자는 지금까지도 일부 하자 보수 및 마무리 작업을 계속 미루고 있다.

‘집 한 번 지으면 10년 늙는다’는 말이 있다. 필자가 잘 알고 있는 80대 노인의 힘겨운 집짓기 사례는 건축적폐의 ‘서울한옥판’에 다름 아니다.

예산이 들어가는 지자체 지원사업은 중간과 마무리 점검을 통해 문제점이 드러날 경우 해결책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행정 중재와 개입이 필요하다. 건축적폐로 인한 사회적 약자의 호소에도 뒷짐만 지고 있다면 지자체마다 내걸고 있는 ‘사람 중심 행정’이란 구호는 공허할 뿐이다.

박인호 전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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