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 총회, 미·러 간 힘겨루기 무대 전락
글로벌 사우스, 미국 주도 분쟁해결에 ‘불신’
유엔의 갈등 해결 능력에 의구심
지난달 9일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이스라엘과 하마스간 전쟁에 대해 유엔 입장을 밝히고 있다. [AP] |
[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어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으로 전세계에 군사적 분쟁이 확산되는 가운데 유엔(UN)의 영향력은 미미한 상황이다. 유엔이 국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신뢰가 이미 회원국 사이에 사라졌다는 진단도 나온다.
외교 전문 매체 포린어페어스(FA)는 유엔 내 각국 외교관들을 인용해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의 긴장이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발생하고 있는 다른 문제에 대한 유엔의 논의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유엔 총회는 미국의 주도 아래 러시아의 침략을 규탄하려는 서방의 무대처럼 보였다.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각종 결의안이 무난히 통과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봄이 되자 러시아의 훼방이 본격화 됐다. 러시아는 바그너 그룹의 지원을 받고 있는 말리 정부와 짜고 유엔 평화유지군의 철수를 종용했고 결국 평화유지군은 10년 만에 임무를 종료해야 했다. 7월에는 러시아는 유엔 구호기관들이 반군이 장악한 시리아 북서부 지역에서 활동하도록 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무를 갱신하는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수단의 군부 간 충돌과 니제르 충돌 과정에서도 유엔은 무기력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9월 연례 총회에서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에 ‘대균열’이 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
FA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은 유엔에 대한 신뢰에 ‘최후의 일격(The Coup de grace)’을 가했다”고 평가했다.
지난 2021년 5월 가자지구 폭력사태 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탄의 과거 분쟁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이 유엔을 통해 중동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번 분쟁을 이용해 발언권을 확대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10월 중순 미국이 하마스에 대한 규탄 표현이 없다는 이유로 가자지구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요구하는 안보리 결의안을 거부하자 바실리 네벤지아 주유엔 러시아 대사는 “우리는 미국의 위선과 이중적인 태도를 개탄한다”면서 “미국이 무기를 팔기 위해 전쟁을 부추기는 것 같다”고 비난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선언한 것은 더 큰 외교적 반발을 불렀다. 이전에 우크라이나의 방어를 지지했던 국가들은 가자지구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됐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의 외교관들은 서방 측이 팔레스타인과 연대하지 않을 경우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기 위한 결의안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비공개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지난달 27일 유엔 총회에서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 휴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120개국의 찬성, 반대 14개국, 기워 44개국의 결과로 통과됐다.
이같은 분열은 최근 유엔에서 글로벌 사우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안보리 개혁을 통해 브라질과 인도 등이 더 큰 외교적 영향력을 갖도록 지원하고 미국에 대한 결속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해 왔다. 또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과 협력해 부채가 과도한 개도국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겠다고 확언했지만 이번 분쟁으로 이러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과정에서 유엔 회원국들 간 외교적 갈등은 차치하고, 유엔 전체 갈등 관리 시스템에 대한 신뢰 역시 금이 갔다는 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구테스흐 사무총장이 “하마스의 공격은 진공상태에서 발생하지 않았다”고 발언하면서 이스라엘은 그의 사임을 요구하고 유엔 외교관들의 비자 갱신을 거부하는 등 강력히 반발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가자지구에선 100명에 육박하는 유엔 직원들이 사망했다.
FA는 “이 발언”이 외교적 사건으로 비화된 것은 유엔 원조 활동이 정치적 갈등에 얼마나 취약한지 분명히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엔 스스로 국제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다목적 틀로서 역할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지난 7월 발표하 ‘평화를 위한 새로운 의제’를 통해 회원국들에게 평화 유지 임무 보단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안보 위협에 집중할 것을 촉구했다.
물론 유엔 체제가 여전히 국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평가도 있다. 유엔 산하 구호기관들은 폭력의 확산을 억제하고 취약한 국가들에 기본적인 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해 세계 은행의 자금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고완 국제위기그룹 유엔국장은 “대한 위기를 해결하는데 앞장서진 못하더라도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한 일에 나설 수 있다”면서 “외교와 안보의 역할을 새롭게 정립해 새로운 국제 현실에 적응한다면 유엔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why37@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