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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타타라타] 전청조 사기사건의 또 다른 본질
뉴스| 2024-05-30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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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표지.


# 마이클 샌델(71 하버드대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2020년)은 ‘정의란 무엇인가’(2009년)에 이어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젊잖게 느껴지는 한국어판 제목(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과는 달리는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능력주의의 폭정: 무엇이 공공선인가?)‘으로 ’폭정‘이라는 표현과 함께 노골적으로 능력주의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 책이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팔리며 화제가 된 것은 그만큼 우리네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고, 능력주의를 맹신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서론은 ’미국판 스카이캐슬‘로 불리는 초대형 대학입시비리(2019년)를 소환했다. 이 점도 마치 ’대학입시의 나라‘ 한국을 고발하는 것 같아 마음에 찔린다.

# 2019년 미국의 입시비리는 유명인사나 재력가들이 자녀를 체육특기자 전형을 악용해 명문대에 보낸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돈 많은 학부모들은 브로커를 통해 거액의 뇌물을 대학관계자에게 전달했다. 천조국답게 뇌물규모가 총 2,500만 달러에 달한다. 50여 명이 기소됐고, 2021년 주요 피의자들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학교와 해당학생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미국 체육특기자 전형에서 부유층이 주로 약용하는 종목은 돈이 있어야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승마, 골프, 펜싱, 라크로스, 스쿼시 등이다. 심지어 장애인 전형을 악용하기도 하는데, 소득수준이 높은 미국 코네티컷주 근교는 미국평균(3%)보다 9배나 높은 18%의 학생이 지적장애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 수능 영어듣기 평가 때 비행기가 이착륙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외에서 화제가 된 한국. 체육특기자 전형을 활용한 입시비리를 그냥 놔둘 리 없다. 역사가 제법 길다. 가까이는 국정농단 사건 때 알려진 정유라(승마)가 있고, 선수선발과 관련한 잡음이 너무 잦아 언론의 조명을 제대로 받지 않아서 그렇지 매년 시비가 끊이질 않는다. 그나마 엄격해졌다는 요즘이 이럴 정도이니 과거에는 황당하다 싶을 정도로 체육을 통해 명문대에 진학한 사례가 아주 많았다. 재력가나 권력층이 쉬쉬하며 체육특기자 제도를 이용해 자녀를 명문대에 진학시켰다. 예컨대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기업의 한 총수가 농구를 통해 K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이 기업은 현재도 프로농구단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총수는 회장실을 찾은 농구인에게 농구공을 튀기며 “나도 고등학교 때 농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 입단속만 잘하면 체육특기자 편법 대학입학은 이후 잘 드러나지 않게 된다.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체육특기자는 ‘정원외’로 분류돼 마음에 드는 전공을 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예전 유명선수들(비리가 아닌 제대로 진학한 케이스)을 보면 명문대의 법학과, 경영학과 심지어 한의학과를 나온 경우가 많다. 농구레전드이기도 한 방송인 서장훈(연세대 93학번)은 “(선후배 농구특기생들이) 죄다 법학이나 경영학과 등 좋은 과들을 택했는데, 나는 운동만 한 사람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사회체육학과를 택했다”고 말한 바 있다. 서장훈 같은 선수는 많지 않다. 유명 선수들이 이럴 정도이니 조용히 스타선수에 얹혀서 편법 입학에 성공한 ‘있는 집’ 학생들은 더욱 표가 나지 않았다.

# 한국에서 체육특기자 전형을 통한 명문대 진학은 예전처럼 쉽지 않다. 예전에는 위에서 언급한 재벌총수처럼 고3 때 갑자기 농구를 시작해 슬쩍 진학에 성공할 수도 있었지만, 요즘은 보는 눈이 많아 쉽지 않다. 그래서 현재 암암리에 유행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착각’에 나오는 방법으로 미국 명문대를 노리는 것이다. 진짜 선수로 대성하기 위해 운동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국 대학에 진학하기 좋은 특정종목을 택해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종목의 저변이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 넓지 않은 까닭에 대회에서 성적을 내기도 좋다. 뭐 그렇지 않으면 아예 어설픈 대회를 급조해 입상실적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미국판 수능인 SAT에서 최소한의 점수만 따면 아이비리그 등 미국 명문대학에 지원해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운동을 가르치는 코치, SAT 선생님, 그리고 입시컨설턴트 등 쟁쟁한 전문가들이 도움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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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청조(왼쪽)와 남현희, [헤럴드경제 DB / 채널A 화면 캡처·'CBS 김현정의 뉴스쇼' 유튜브 캡처]


# 2023년 10월 중순이니 만 6개월이 경과했다. 바로 전청조 사기사건이다. 2023년 주요 10대 뉴스에 꼽힐 정도로 이 사건은 자극적인 얘기들로 넘쳐났다. 펜싱 레전드 남현희의 약혼자가 재벌의 혼외자로 엄청난 재력가인 전청조였는데, 알고 보니 그가 희대의 사기꾼이었고, 심지어 원래는(물론 아직도) 여자였다고 하니 선정적인 보도가 한국사회를 강타했다. 6개월여가 지난 최근에도 ‘남현희가 SNS를 재개했다’, ‘전청조가 아동학대 혐의로 추가 기소됐다’ 등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 그런데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질 필요가 있다. 사기꾼 전정조는 왜 남현희를 택했을까? 진정한 사랑을 운운하기에는 사기사건의 내용 하나하나가 고약하니 이는 정답에서 제외하자. 가장 그럴 듯한 답은 ‘공정하다는 착각’에 제시돼 있다. 남현희 주위에 돈많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현희의 선배 중 이미 서울 강남의 유학업체에 합류해 펜싱을 통한 미국유학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이가 있다. 남현희의 펜싱 클럽은 이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물론 생활체육(취미)이나 아니면 진짜 미래의 펜싱스타를 꿈꾸고 펜싱을 배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도 펜싱을 배우고, 자녀에게 가르칠 정도면 소득수준이 평균 이상이겠지만 이 기사의 대상은 아니다. 문제는 미국 유명대학 진학을 목표로 초중고 자녀에게 펜싱을 가르치는 것이고, 이는 머니게임이 된다.

# 펜싱클럽을 통해 펜싱기량을 높이고, 미국 SAT에서 기준 이상의 점수를 받을 정도만 공부하면 미국 명문대 진학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미국 유명대학의 펜싱지도자나, 입학사정관 등과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면 마지막 퍼즐이 완성된다. 한국이 펜싱강국이니 더욱 그럴 듯하다. 이렇게 하려면 유명하고 능력있는 펜싱코치, SAT 선생님, 유학컨설팅 전문가 등의 조력이 필수다. 실제로 이 어려운 일을 쉽게 해낼 수 있다며 역대 실적까지 자랑하는 강남의 유학업체들이 있다. 돈만 충분히 낸다면 말이다. 미국 명문대 진학에 실패했을 경우 그 동안의 비용을 돌려준다거나, 거꾸로 최종 입학에 성공했을 경우 거액의 성공보너스를 내기도 한다. 이쯤이면 교육이 아니라 돈잔치다.

# 현재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가 ‘교육을 통한 부의 대물림’이다. 예전에는 가난한 집에 태어났어도 머리가 좋거나, 엄청난 노력으로 성공을 이뤄낸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갈수록 이러한 바람직한 사회이동은 어려워지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미 용들의 사회에서는 한국의 명문대학은 선택사항 중 하나일 뿐이다. 최고의 사교육을 제공해 용들의 자녀가 한국에서 SKY 등 명문대에 진학하면 1옵션 달성이다. 이것이 안 될 때 스포츠를 통해 미국 명문대에 체육특기자로 진학하는 2옵션이 암암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용들의 사회에서는 돈걱정은 없다. 외국유학까지 다녀온 용들의 2세는 대기업이나 공무원 시험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인맥을 통해 좋은 곳에서 경험을 쌓고, 사업 등 남들이 보기 좋은 일을 택해 보란 듯이 살면 된다. 2옵션이 1옵션만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A급 국제대회에서 잇단 쾌거를 달성해 한국 스포츠의 자랑이 된 펜싱. 이 펜싱이 돈많은 사람들의 미국 유명대학 편법입시에 활용되고 있고, 이 속성을 파악한 사기꾼이 펜싱클럽을 무대로 못된 행각을 벌였으니 속이 상할 뿐이다.

유병철 전문기자(가천대 운동재활융합연구소 수석연구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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