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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호 굴토하는데 한나절
뉴스종합| 2011-06-24 12:53
땡볕에서 시간과의 사투

DNA조사전 땀·침 묻을라

더위에도 장갑·마스크 착용

“유품 하나라도 더 찾자…”

유해 찾은뒤에도 손길 분주

지난 17일 경기도 남양주시 닭계산. 전투복 차림의 국군 장병 100여명이 시간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곳은 국방부 유해 발굴 현장. 이날 기온은 섭씨 31도. 총 대신 야전삽과 발굴용 도구를 손에 쥔 장병들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 지역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서울 수복 당시 국군이 방어하던 곳. 이듬해 1ㆍ4후퇴 이후 중공군과 국군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면서 격전지가 됐다. 해발 482m의 닭계산에 오르는 길은 장병 100여명이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산에 올라간 흔적이 역력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뽀얀 먼지가 흩날렸다.

산을 오르는 길 중간중간에는 개인호로 추정되는 곳마다 굴토한 흔적이 눈에 띄었다. 보통 굴토 작업은 가로 1m, 세로 0.7m 크기에 40~50㎝ 깊이로 파게 된다. 두 명이 1개조로 한나절을 파야 딱딱한 생토까지 팔 수가 있다. 이러한 굴토작업을 100여회를 해야 겨우 유해 1구를 찾을 정도로 지난한 활동이다.

그렇게 발견을 하더라도 유해 전체가 발굴되는 경우는 10% 안팎. 손가락뼈는 DNA 감식도 쉽지 않다. 대퇴부 뼈나 갈비뼈가 나와야 유전자 감식이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발굴 일정이 끝나면 민원 때문에 굴토한 자리를 메우는 원상복구 작업을 해야 한다. 말 그대로 ‘삽질’하는 셈이다. 그래도 발굴팀은 유해 1구를 수습할 수 있다면 이 정도 수고는 감내하겠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었다.

50분가량 걸어 올라간 뒤 두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서야 유해 발굴중인 장병들과 조우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무더위 속에서도 발굴단은 수술용 라텍스 고무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발굴된 유해를 수습해 DNA 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침이나 땀이 묻어선 안 된다. 발굴팀원은 행여나 이물질이 묻을까봐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현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남양주뿐만 아니라 영천, 의성, 인제, 양구, 화천, 홍천, 경기도 광주 등 8개 지역에서 발굴이 진행 중이고, 2개 기동팀 등 총 10개팀이 꾸려져 있다.
국방부 유해발굴단이 지난 17일 경기 남양주시 닭계산에서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군 관계자가 견학온 대학생들을 상대로 발굴작업 내용 등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1개 사단마다 발굴팀이 꾸려지고 팀장을 포함해 8명이 한 팀을 이룬다. 일반 장병들이 탐사에 나서고, 유해가 발견되면 발굴 교육을 받은 팀원들이 문화재를 발굴하듯 붓이나 발굴용 도구를 이용해 유해를 수습한다. 자칫 유품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 더디지만 섬세한 손길로 수습이 진행된다.

발굴된 유품 중에는 이름을 새긴 숟가락, 만년필 등도 있다. 탄환 끝으로 한 글자씩 이름을 새겨 넣은 유품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용사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전국에 미수습 전사자가 13만여명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지난 10년간 국군전사자 4698구가 수습됐다. 그 과정에서 발굴단은 무수한 어려움과 직면했다.

국방부 유해발굴단 발굴과장 주경배 중령. 그는 월요일에 집을 나서면 주중에는 전국으로 이동하며 유해 발굴에 나선다. 서울에 있는 집에는 주말에야 들를 수 있다. 혹서기인 8월과 혹한기 12월부터 2월까지 다음 반기 발굴 계획을 준비하는 4개월 빼고는 항상 현장에서 생활을 해야 한다. 주 중령은 “매일 잠자리가 바뀌는 것이 제일 불편하다. 주중에는 발굴 현장 인근 부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석달 동안 주 중령이 이동한 거리는 무려 1만6000㎞에 이른다. 주 중령은 “일반 부대에서는 이 정도 무사고 운전을 하게 되면 운전병에게 몇 번이나 특박을 보내줬을 텐데, 같이 이동하다 보니 특박을 못 보내고 있다”고 겸연쩍어했다.

발굴단이 직면하는 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다. 신원이 확인된 64명 중 단 4명만이 순전히 DNA 감식 결과로 확인됐다. 전국 253개 보건소에서 구강 내 상피세포를 채취하고, DNA 감식결과로 8촌까지 확인이 가능하지만, 유가족들의 참여가 저조하다. 무료 건강검진까지 해주면서 참여를 유도하고 있지만, 채취 사실을 아는 이도 드물고, 알더라도 이미 유해마저 흙이 됐는데, 굳이 찾을 이유가 있느냐는 유가족들을 대할 때면 탐문에 나선 발굴단원들은 힘이 빠진다.

그래도 전사자들을 유가족에게 돌려보낸다는 사명감으로 하루하루 발굴에 나선다. 주 중령은 “유해를 찾는 것은 결코 ‘작업’이 아니다. 인원을 대폭 늘려 한 번에 끝내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발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며 “호국영령에 대한 경건함이 전제돼야 하고, 유해 훼손을 예방하기 위해 발굴팀에게 교육도 실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감식 비용도 만만찮다. 한 구를 감식하는데 평균적으로 200만원이 소요된다. 유해 감식과 유가족 감식을 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해가 평탄한 곳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이전 발굴이 진행된 강원도 양양에서는 돌무더기, 바위더미 사이에서 9구가 수습됐다. 절벽에 가까운 경사면에서 유해가 발굴되면서 발굴팀은 작업 중에 미끄러지고 다시 올라가기를 거듭해야 했다.

그래도 이날 발굴에서는 유해 3구가 수습됐다. 이찬우 하사는 “힘들지만 유해를 찾으면 피로가 확 풀린다”며 “며칠 동안 안 나왔는데, 정성이 하늘에 닿은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전역을 한 달 남짓 앞두고 있다는 김대현 병장은 “2년째 유해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데 유해발굴은 단순노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처음에는 그냥 시키는 대로 작업만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사명감도 생기고 마음가짐이 점점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미 해가 남중한 뒤 서쪽으로 옮겨가는 시간임에도 배고픔을 잊고 오히려 힘을 내고 있었다.

이날 발굴 현장을 견학한 김경진(신성대학 전문사관학과 2학년) 씨는 “유해가 발견된 것을 보면 산에 오르기 전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의 시간을 가진 것이 영향을 미친 것 같아 흐뭇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을 인솔하던 이석호 교수도 감회가 남달랐다. 30년간 군생활을 하고 해병대 대령으로 예편한 이 교수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학생들에게 깨우치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유해발굴은 전쟁이 끝나고 바로 시작됐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시작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국방부 유해발굴정책담당 류명오 중령은 “지난해 강원도 양구에서 발굴한 국군 7사단 소속의 ‘호국의 형제’로 사람들이 유해발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며 “현충일 다음날 250건이나 제보가 폭주했다”고 말했다. 전사자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일반인들의 관심과 유가족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이태형ㆍ문영규 기자/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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