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를 획득한 한국 사격의 산실인 태릉사격장 건물 입구에는 큰 돌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1970년대 중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센 권력을 갖고 있던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이 대한사격연맹을 맡던 시절, 국제적인 수준의 사격장 건립을 위해 돈을 낸 삼성 이병철 회장 등 국내 재벌총수 20여명의 이름을 새긴 동판이 이 비석 하단에 붙어있다. 아마도 이 동판은 재벌기업들이 스포츠 지원에 참여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린 최초의 기념비일 것이다. 물론 당시 기업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 신임을 받고 있던 박 회장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돈을 냈을 터이지만 말이다.
한국 사격은 기업들까지 동원하는 박 회장의 과감한 지원과 적극적인 육성에 힘입어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차영철이 사상 첫 은메달을 딴 데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이은철, 여갑순이 금메달 2개를 획득해 세계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이번 런던올림픽에선 진종오가 혼자 금메달 2개를 획득하며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이어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고 김장미가 예상 밖의 금메달을 추가해 사상 최다인 3개의 금메달 수확을 거두었다.
기업들의 본격적인 스포츠 지원은 ‘스포츠 공화국’을 주도했던 전두환 정권의 5공화국 시절,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서울올림픽이 성공하려면 각 기업들이 경기단체 하나씩 맡아야한다’는 정부의 의지에 따라 이뤄졌다.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일군 사격뿐 아니라 양궁, 레슬링, 체조 등이 대기업과 공기업의 지원을 받게 된 것은 5공 시절 타의로 맺어진 게 계기가 됐다.
사격과 함께 금메달 3개를 따낸 양궁의 회장사인 현대자동차그룹이 처음에 양궁협회를 지원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초 정주영 회장이 서울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과 대한체육회장을 맡으면서였다. 현대그룹은 양궁협회와 손잡게 됐으며 정몽준, 정몽구 회장에 이어 현재 정몽구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회장에 이르기까지 27년간 약 300억원 이상의 투자를 했다.
김현우가 금메달을 획득한 레슬링은 오랫동안 삼성그룹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다. 1980년대 정부의 요청을 받은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이 레슬링 선수 출신으로 레슬링에 관심이 많은 점 때문에 레슬링협회를 맡아 300억원 이상 재정적 지원을 해왔다. 경기인 출신이 회장을 맡고 있는 현재도 삼성그룹은 6억원 이상 협회 지원을 하고 있다.
‘강압’에 의해 시작된 재벌기업의 스포츠 후원은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 민주화, 문민화 시대를 거치면서 사회공헌 일환의 형태로 바뀌었다. 정부의 눈치를 보던 시대는 끝났지만 기업들은 이윤추구뿐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갖고 스포츠에 지원을 하게 된 것이다. 불모지 펜싱에서 금메달 2개가 나왔고 수영 박태환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고 여자 핸드볼이 ‘우생순’ 신화를 연출하며 강세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SK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삼성그룹, 현대자동차그룹 등도 기업의 사회적 사명감과 공공 이미지 관리를 위해 5공 때부터의 지원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스포츠 후원을 통해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스포츠 한국을 빛내는 재벌기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