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하는 이광호 마사회 경마심판위원장
경마 공정성 목숨처럼 지켜온 27년”
경마에서는 다른 말의 주행을 방해할 경우 먼저 결승점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순위가 뒤로 밀려난다. 지금이야 경마 관중이라면 누구나 이해하는 선진화된 규정들이지만 처음 도입할 때만 해도 심판위원이 관객에게 멱살을 잡힐 정도로 진통이 있었다.
멱살을 잡히며 순위 변경 제도의 기반을 다졌던 이가 바로 이달로 은퇴하는 이광호(55·사진) 한국마사회 경마심판위원장이다. 어느새 심판생활을 한 지 27년이 지나 지난달 26일 심판실에서 마지막 경주를 지켜봤다.
1991년 새로 도입된 기준에 따라 제주경마장에서 1, 2위로 들어온 경주마 두 마리를 주행 방해로 판단해 도착 순위를 변경하자 난동 수준의 고객 항의가 빗발쳤다.
“고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직접 관람대로 내려가 설명을 했다. 그러자 고객들이 나를 둘러싸고 더욱 격렬히 항의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내 멱살을 잡고 따지는 사람도 있었다. 한참을 설명하고 심판실로 돌아와 보니 와이셔츠 단추가 다 떨어져 있더라.”
그는 심판위원장에 오른 뒤 면허 정지 처분을 받은 경마 관계자에 대해 ‘투아웃’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출발 후 100m 이내 진로 변경 금지 등의 규정으로 경마의 안정성과 공정성을 강화했다.
경마 심판들은 경주로가 한눈에 보이는 관람대 6층 심판실에서 쌍안경과 모니터를 이용해 선수의 조그만 손동작까지 미세한 부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경주를 관찰한다. 찰나의 순간에 10여마리의 말과 기수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집중력이 필요하다.
긴장 상태로 하루 12개 이상의 경주 심판을 소화하다 보면 녹초가 되지만 경주 후에도 판정에 불만을 가진 고객들이 심판실로 직접 찾아와 서너시간씩 끝장토론을 벌이는 일은 예사다.
이 위원장은 “선수나 감독들은 늘 제재가 많다고 하고, 고객들은 항상 제재가 적다고 한다”며 “또 날씨가 안 좋을 때는 안전을 위협받는 기수들은 경주 취소를 원하고, 상금을 받는 마주나 감독, 고객들은 경주를 강행하길 원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백번을 잘하다가도 단 한 번 잘못으로 선수는 물론 언론과 팬들의 뭇매를 맞는 것이 스포츠 심판이다. 수많은 사람의 희비가 바뀌는 순위 변경이나 실격 처분을 비롯해 선수나 경주마에 대한 제재 또한 경마 심판의 손끝에서 결정된다.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에 따른 책임감도 무겁다. 법정에서 피고의 유무죄를 심판해야 하는 법관의 심정과 다를 것이 없다.
이 위원장은 “심판 결정에 따라 수만명의 이해관계가 갈리는 경마에서 심판들이 갖는 심리적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려니 후련하지만 오랫동안 사명감으로 심판실을 지켜온 만큼 섭섭함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심판 결정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애피소드도 많았지만 비리 의혹 등으로 한 번도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놀랍다. 이 의원장의 당당한 은퇴 배경에는 목숨처럼 지키려 했던 양심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안상미 기자/hu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