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경제
[리얼푸드]“할머니 보고 싶습니다”…추억이 담긴 도토리묵
뉴스종합| 2015-10-21 11:36
-구황식에서 웰빙식으로 변했지만, 우리 어린시절의 애틋한 기억 담은 도토리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빨리 가자고!” 아이는 자꾸 할머니의 옷자락을 붙잡고 끌었다. 그러나 고쟁이 바지 주머니가 터져나가도록 도토리를 주워담은 할머니는 굽힌 허리를 펼 줄 몰랐다. “아이고 이 아까운 것을 어찌 두고 그냥 가냐. 너 먼저 내려 가그라.”

다음날 아이네 밥상에는 야들야들하고 쌉싸름한 도토리묵이 소담하게 올라왔다.

20년도 넘은 기자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새삼 끄집어낸 것은 얼마 전 동네 뒷산을 거닐다 한 모자의 비슷한 실랑이를 봤기 때문이다. 아이는 “선생님이 그랬단 말이에요. 도토리는 산에 사는 멧돼지랑 다람쥐가 먹어야 되니까 남겨둬야 된다고….”

불만 섞인 말을 뱉었다. 빨리 집에 가고픈 핑계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마음 씀씀이가 기특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한국인에게는 상당히 보편적인 것인 모양이다. 수필가 강영구 씨는 한 글에서 졸지에 도토리묵을 만들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강 씨는 단풍 구경하러 산에 갔다가 도토리를 한 웅큼 주워왔는데, 남편이 당장 도토리를 더 주우러 가자고 했다고 한다. “특별한 음식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어떻게 도토리묵을 만드냐”고 항변해봤지만, 그는 결국 떠밀려 난생 처음 도토리묵까지 만들게 됐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한국인의 기억에 도토리가 이만큼 보편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아주 오래전부터 도토리를 먹어왔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도토리는 아주 요긴한 구황식이었다. 도토리를 먹은 역사는 선사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서울 암사동이나 경기도 미사리 등의 유적지에서 도토리와 함께 토기가 발견된 것을 바탕으로 추측한 것이다. 도토리는 가열을 통해 탄닌 성분을 제거해야 먹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무렵부터 먹기 시작했다고 본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한국인에게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음식인 ‘묵’의 역사도 이 무렵부터 시작됐다고 보기도 한다.

도토리는 역사 시대에 들어서도 종종 기록에 등장한다. ‘고려사’에는 흉년이 들자 왕이 식찬을 줄이고 도토리를 가져다가 맛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구황식으로 활용하기 위해 도토리나무 심기를 권장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도토리묵은 심지어 임금의 수라상에도 올랐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양을 떠나 북쪽으로 피란을 가자, 산골에 사는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급한 대로 도토리를 주워 묵을 쑤어 수라상에 올렸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선조는 궁궐로 돌아와 피란 시절의 고생을 잊지 않기 위해 도토리묵을 수라상에 올리라 했다고 한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지금에야 별식 취급을 받지만, 최근 들어 새삼 주목받는 것이 다이어트 식품으로서의 기능이다. 도토리에는 지방이 몸속에서 축적되는 것을 막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다이어트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paq@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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