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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再造山河(재조산하)’
헤럴드경제| 2017-04-04 13:58

[헤럴드경제= 외부칼럼] 풍산류씨 대종회 부회장, 서애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 류을하


문재인 前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17년 새해를 맞아 政治的 결의를 ‘再造山河’라는 四字成語로 표현하였다. ‘再造山河’를 직역하면 ‘나라를 다시 만들다’는 뜻이다.

문재인 前 대표측에서는 ‘再造山河’의 의미에 대해 “壬辰倭亂 당시 실의에 빠져 있던 西厓 柳成龍에게 忠武公 李舜臣이 적어 준 글귀입니다.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만들지 않으면 죽을 자격이 없다는 忠臣들의 마음으로, 우리가 大韓民國 大改造에 나서야 할 때임을 뜻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再造山河’라는 말은 李舜臣이 西厓선생에게 적어준 글귀가 아니며, 지난 2015년 KBS-1TV에서 방영한 드라마 ‘懲毖錄’의 대사를 出典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출처=KBS 드라마 징비록]

드라마 ‘懲毖錄’에는 전라좌수영으로 李舜臣을 찾아온 西厓선생이 진주성 함락 등 참담한 소식을 접하고, “눈을 감으면 죽은 군사들과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귓속을 맴돌아 살아갈 자신이 없어”라고 하자, 李舜臣이 “죽음으로 도피할 생각을 마십시오, 피땀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땀과 눈물로 민심을 돌려세워야 합니다, 그 전에는 우리는 죽을 자격도 없습니다”라고 한 다음, “대감에게 필요할 것 같아 적어 보았다”며 ‘再造山河’ 네 글자가 적힌 종이를 품속에서 꺼내 주었다는 스토리가 펼쳐진다.

드라마의 이 대목은 사실이 아니다. 實錄과 文集 등 각종 기록으로 考證해 보면, 西厓선생은 壬亂 도중 李舜臣을 만나러 전라좌수영에 내려간 사실 자체가 없으며, 李舜臣이 ‘再造山河’라는 네 글자를 西厓선생에게 제시한 사실 또한 어느 시기에도 없다. 따라서 드라마의 이 대목은 劇的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제작진이 윤색한 ‘가상의 設定’이다.

‘再造山河’의 진짜 출전은 宣祖實錄의 西厓선생 업적 관련기사이다.

임진왜란 당시 明나라 皇帝 신종은 宣祖가 무능력하다고 보고, 1593년 11월 부하 ‘司憲’을 특명 使臣으로 朝鮮에 보내 “여차하면 王을 갈아치우도록” 하였고, 宣祖 또한 명나라 皇帝의 뜻을 알고 ‘司憲’에게 (광해군에 대한) 양위의사를 직접 표명하였으나, ‘司憲’이 1주일간 체류하면서 조선 내정을 점검한 결과, 西厓선생의 뛰어난 활약과 憂國衷情에 감복한 나머지 양위계획은 없던 일로 하고, 宣祖에게 “柳成龍에게 국정을 전임시키면 山河를 再造할 것”이라고 높이 평가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6일 병신 8번째 기사, 1593년

「흠사 일품 복색 행인사가 보낸 자문」

(---상략)
의정 류성룡은 굳세고 정도(正道)를 잡아 모든 신하의 으뜸이 되고 있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 왔으니, 왕은 참으로 모든 국정(國政)을 그에게 전임시키면, 그는 반드시 왕을 위하여 근심을 나누고 일을 맡아서 어려움을 물리치고 어지러움을 진정하여 사직(社稷)을 안정시킬 것이며 산하(山河)를 재조(再造)할 것입니다. 윤두수·윤근수로 말하면 왕이 평소에 가까이 하고 믿는 사람이고 판서 한준 등은 평소에 명성이 있었으니, 왕은 그들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다하여 국가의 급무를 돕게 하고, 바라보기만 하고 게을리 하여 패망의 길을 다시 밟지 못하도록 책망하소서. 위와 같이 이자(移咨)하니, 살펴서 시행하고, 빨리 자문으로 회보(回報)하시기 바랍니다. 위와 같이 조선 국왕에게 알립니다."

또한 ‘司憲’은 宣祖에게 “柳成龍의 남다른 굳은 충성심과 독실한 仁義는 中國의 문무백관과 장수들이 모두 기뻐해서 칭송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王은 참으로 현명한 宰相을 얻었습니다”(西厓 연보)라고 하였으며, 후일 仁祖의 장인이 된 韓浚謙(西厓선생의 종사관 역임)은 본인의 手記에서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感歎하였다.

(---상략) 이보다 앞서 경락 송응창이 요동에 있으면서 명 황제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우리나라 임금이 실덕을 많이 해서 전란을 평정할 능력이 없는 군주가 되었으므로, 속히 조치해서 세자에게 왕위를 전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이 때문에 사신 사헌이 나와 우리 입장이 지극히 난처하게 되었었다.그러나 공(류성룡)이 피나는 정성을 다하여 화인(중국인)을 감동시켰고,그로하여 임금의 位도 안정되었다. 국가가 그에 힘입어 중흥이 되었으니,이 모두 누구의 공이라 하겠는가.公은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소리도 하나 내지 않으면서 나라의 기반을 태산같이 튼튼하고 안정되게 조치하였다.이 모든 일들이 다 경과한 후에도 공은 입을 굳게 다물고 일체 당시 일을 말하지 않았다.옛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신기로운 공을 거두었는데도 조용하기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했다’는 것이 역시 공의 이 같은 일처리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西人들이 만든 선조수정실록에도 ‘司憲’이 皇帝의 勅書를 가지고 다녀간 사실과 朝鮮 조정에서의 대응을 아래와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26년 계사(1593) (만력21)  윤 11월 1일(신사) 

 
「황제가 행인사 행인 사헌을 파견해 칙서를 선포하게 하다」

(---상략)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우리 나라가 쇠약하여 떨치지 못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논의가 무성하였다. 급사중(給事中) 위학증(魏學曾)이 주본(奏本)을 올려 우리 나라의 일을 말한 가운데 한 조목을 보면,“조선이 이미 제대로 왜적을 막지 못하여 중국에 걱정을 끼쳤으니, 마땅히 그 나라를 분할하여 두셋으로 나눈 뒤 왜적을 막아내는 형편을 보아 나라를 맡겨 조치하게 함으로써 중국의 울타리가 되도록 하소서.”하였다.(---중략) 사헌이 이르러 칙서를 선포하고 관소(館所)로 들어갔는데, 예모가 매우 준엄하였다. (---중략) 그 이튿날 상이 사헌 사신을 관소에서 접견하고 소매 속에서 수첩(手帖)을 꺼내어 사신에게 주었는데, 그 대략의 내용은,“질병 때문에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니, 대인(大人)이 주장해 주기 바랍니다.”하는 것이었다.(---중략)  이튿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명나라 사신에게 정문(呈文)하여 본국의 사정을 차례로 진술하면서, 왕이 의리를 지키다가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이고 잘못한 점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였다. 류성룡이 또 유격(遊擊) 척금(戚金)을 통하여 전위(傳位)하는 일은 매우 불가하다는 점을 은밀히 말하였다. 사헌 사신이 이때부터 상을 대하면서 예의가 상당히 깍듯해졌다.(---하략)

또한, 우복 정경세가 지은 「西厓行狀」에서도, ‘司憲’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西厓선생께서 ‘사헌’과 친한 명장 ‘척금’을 야간에 설득하는 ‘물밑 외교’를 펼친데 이어, 이튿날 백관을 이끌고 나아가 ‘讓位不可論’을 조리 있게 설파하는 正攻法을 통해 마음을 돌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상략)당시에 성중(城中)에는 다른 장수는 없고 오직 척 유격(戚遊擊,척금) 혼자서만 아침저녁으로 조사(사헌)의 곁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조사와 아주 친밀하였다. 이날 밤에 척 유격이 공에게 서로 만나자고 하고는 좌우를 물리치고 글씨를 써 가면서 서로 문답하였는데, 척 유격이 예닐곱 조항을 써서 공에게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 한 조항에 이르기를, ‘국왕께서 전위하는 것은 되도록 빨리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였다. 이에 공이 깜짝 놀라 일어나 다른 일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고 곧바로 글로 써서 말하기를,
“제3조에서 논한 바는 배신(陪臣)으로서는 차마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노야께서는 만 권의 서책을 읽어 고금의 사변(事變)에 대해 환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소방의 형세가 바야흐로 아주 위급한데, 만약 또 군신 부자 사이에 조처함이 마땅함을 잃으면, 이는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입니다.”하니, 척 유격이 그 말이 옳다고 하고는 즉시 그 종이를 촛불에 태워 없애 버렸다. 그다음 날 공(서애선생)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사(明의 사신)에게 정문(呈文)을 올려 ‘주상께서는 본디 왜적들이 쳐들어오게 할 만한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변란이 일어난 뒤에는 왜적을 막는 일을 조처한 것이 아주 상세하였다.’는 내용으로 극력 진달하니, 조사가 믿고서 받아들였다.이날 밤에 척 유격이 또 공을 불러 말을 나누면서 말하기를, “조사의 뜻이 이미 완전히 돌아섰으니, 달리 걱정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조사(사헌)가 상과 서로 만나 볼 적에 예모(禮貌)가 더욱 공경스러웠다. 조사가 돌아감에 미쳐서는 자문을 보내어 신칙하고, 또 차부(箚付)를 공에게 부쳤는데, 그 속에는 ‘재조하산(再造河山)’이라는 말이 있었다.

한편, 西厓선생을 깊이 연구한 석학 송 복 교수는 선생의 위업이 ‘再造山河之功’임을 감안하여, 지난 2014년 5월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라는 제목으로 평전(출판사 ‘시루’)을 낸 바 있는 등, 현대에 들어서도 ‘再造山河’는 西厓선생을 象徵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하고 있다.

1592년(선조25) 壬辰倭亂이 발발하고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이전까지의 5년의 기간 중 나라가 망할 다섯 번의 決定的인 危機가 있었는데, ①도성을 떠난 宣祖가 요동으로 자진 亡命하겠다고 고집하여 기다려 보지도 않고 조기에 自滅할 수 있었던 위기이고, ②平壤을 차지한 倭軍이 곧바로 宣祖를 追擊했을 경우 포로가 될 수 있었던 危機였으며, ③明과 倭가 朝鮮半島를 한강을 경계로 분할점령하려 했던 陰謀였다. 그리고 ④宣祖가 양위 했을 경우 內紛과 명나라의 섭정 흉계(사실상 직할 통치)에 따른 파멸이 올 수 있었고, ⑤성난 백성들로 인한 민중봉기의 위기가 그것이었다.

이 다섯 번의 危機 중에서, 非軍事的 분야인 ①③④ 세 번의 위기는 西厓선생의 智謀와 결단과 血誠이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극복되었고, 평양성 함락 후 軍事 차원의 危機인 ②의 극복은 西厓선생이 후원한 李舜臣이 制海權을 장악함으로써 倭의 보급 및 합세 루트를 차단하여 더 이상 進擊하지 못하도록 발을 묶은 戰功 덕분이며, ⑤의 民心이반에 의한 위기는 西厓선생이 면천법․호포법․작미법(대동법)․속오군․훈련도감 등의 일대 改革조치와 崇農抑商 탈피 등을 통해 과감하고 선제적으로 예방 또는 收拾했기 때문에 극복한 것이다.

또,1597년 1월 정유재란 발발에서 부터 1598년 11월 終戰까지의 기간에는 ①선조가 李舜臣을 죽이려 했던 사건과, ②수군의 지리멸렬로 인한 制海權 喪失 등 두 번의 큰 위기가 있었는데, ①은 西厓선생이 ‘己丑獄死’(1589년,선조22)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名士를 시기하고 제거해온 宣祖의 면전에서 民心을 얻고 있는 李舜臣의 후견인이자 衆望을 받고 있는 首相이 대 놓고 구명하면, 두 사람이 싸잡아 抗命으로 몰려 죽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말을 아끼고 자진 사퇴 의사를 반복하는 등의 ‘처절한 忍耐’로 극복하였고, ②는 살아서 복귀한 李舜臣이 명량해전(1597년 9월, 선조30)에서 극적으로 승리함으로써 극복되었다.

그래서 西厓선생은 마침내 ‘司憲’의 예언처럼 ‘再造山河’의 위업을 이루었는데, ‘再造山河’란 단지 宣祖의 讓位를 막은 좁은 의미에서의 공로가 아니라, 外交와 軍政 및 민심수습 등 國政 全般에 걸쳐 비교할 수 없는 功을 세워, 망한 나라를 다시 만들었다는 넓은 意味의 功勞를 말한다. 

여기에서 西厓선생의 일생과 진면목을 재조명 해보면, ①‘再造山河’의 조선 제일 공신이고, ②실용과 改革을 앞서 추구한 經世와 愛民의 큰 산맥이며, ③淸廉하고 유능한 公人의 表象인 동시에, ④당쟁의 시대에 相生을 추구한 온건 合理的인 政治人이고, ⑤‘懲毖錄’ 저술로 후세에 安保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인물인 등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선생께서는 힘겹고 흐트러진 戰亂 속에서도 民族이 반드시 中興할 것이라는 확신에 입각하여, 安保가 튼튼하고, 民生과 經濟가 살아 움직이며, 政治가 安定된 그런 나라를 추구한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도 ‘敎訓 덩어리’ 그 자체이며, 우리 민족 萬世의 師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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