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팬데믹 지나고 역대급 호황
클래식·뮤지컬 양극화 극심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팬데믹의 그늘에서 3년간 침체됐던 공연계는 마침내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최정상 오케스트라의 내한 러시가 이어졌고, ‘스타 파워’를 등에 업은 대작 뮤지컬, 연극이 관객을 공연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마냥 청신호는 아니다. 외적 성장의 이면 뒤엔 양극화가 두드러졌다. 올 한 해 공연계의 키워드는 ‘빈익빈 부익부’였다.
27일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운영하는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올 3분기까지 국내 공연시장의 티켓 판매액은 8295억원을 달성했다. 공연계의 ‘극성수기’에 해당하는 연말 매출을 더하면 공연 시장 사상 최고 매출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미 1조원 돌파가 예상된다”고 관측하고 있다. 공연계는 지난해 9725억원으로 역대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과 피아니스트 임윤찬 [빈체로 제공] |
취소와 연기가 일상이던 팬데믹을 지나오자, 클래식 공연계는 유례 없는 특수가 시작됐다. 지난 3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클래식계의 슈퍼스타’ 조성진의 협연을 시작으로 12월까지 스타 연주자, 세계 최정상 악단의 공연이 이어졌다.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로열콘세르트헤바우(RCO)의 공연이 몇 주 사이에 이어진 것은 전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최고 중의 최고’가 모인 서울 클래식 공연의 티켓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베를린필은 최고 등급 좌석인 R석의 가격을 55만원으로 책정, 역대 최고가 기록을 썼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는 “올해는 엔데믹과 함께 기존에 억눌린 공연과 소비 욕구가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한 해였다”며 “단순히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만 움직인 것이 아니라, 코로나19동안 움츠렸던 욕구들의 반동, 이와 더불어 튀어나오는 에너지가 섞여 호황을 이뤘다”고 봤다.
화려한 성찬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진 못했다. 쏟아지는 공급에 클래식 음악계는 내수시장의 한계를 확인했다. 한정된 수요에 치솟는 티켓 가격으로 인해 클래식 애호가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업계 관계자들은 “초대형 공연이 쏟아졌지만, 공연 기획사와 공연장의 입장에선 출혈 경쟁이 극심한 한 해였다”며 “특히 공연이 동시간대로 겹치면 티켓 판매율이 뚝 떨어지는 등 클래식 음악 소구층이 두텁지 않다는 것을 또 한 번 실감했다”고 토로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오른쪽)와 피아니스트 조성진 [연합] |
K-클래식 스타들의 활약은 여전했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날아든 최고의 이슈는 단연 조성진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한국 공연을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조성진이 2024년 시즌 상주음악가로 선정됐다는 ‘깜짝 소식’을 알렸다. 한국인으로는 최초, 아시아인으로는 일본 피아니스트 우치다 미쓰코 이후 두 번째다. 류 평론가는 “베를린필이 조성진을 상주 음악가로 선정한 것은 올 한 해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가장 주목해야 할 만한 일이었다”며 “조성진과 한 클래식 음악 시장의 중요성을 반영한 결과”라고 봤다. 조성진의 뒤를 잇는 ‘클래식 아이돌’ 임윤찬은 점차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5월 임윤찬의 뉴욕 필하모닉 데뷔 무대를 “꿈 같은 연주”라고 극찬했고, 최근엔 올해 발표된 최고의 클래식 음반 25선을 발표하며 지난 6월에 나온 ‘임윤찬-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을 포함했다.
한국은 올해에도 ‘콩쿠르 강국’이었다. 지난 6월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선 바이올리니스트 김계희, 첼리스트 이영은, 테너 손지훈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8월 지휘자 윤한결이 한국인 최초로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다. 9월엔 비올리스트 이해수가 독일 최고 권위의 ARD 콩쿠르에서 우승 소식을 들고 왔다.
국내에 유럽 뮤지컬 열풍을 몰고 온 ‘레베카’, ‘마리 앙투아네트’, ‘엘리자벳’을 만든 세계적인 ‘뮤지컬 콤비’인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가 7년에 걸쳐 매만진 신작 ‘베토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4000억원 매출을 달성한 뮤지컬 시장의 기세는 올해도 여전했다. ‘영웅’과 ‘레베카’가 영화로 치면 1000만 관객에 해당하는 100만 관객을 달성했고, 대작 뮤지컬들이 장기 공연으로 시장 확장을 이끌었다. 규모만으로 보면, 지난해 매출 성과는 거뜬히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높은 티켓 가격과 베스트셀러 대작의 장기 공연 ‘콤비 플레이’는 매출 상승을 견인한 요소다. 최고가 좌석 기준 19만원에 달하는 ‘오페라의 유령’이 8개월간 장기 공연을 이어가며 매진 사례를 이어간 것은 업계 매출 확대를 이끌었다는 분석이 많다.
원종원 순천향대학교 교수는 “올해의 뮤지컬 계는 비상시국에서 벗어나는 해로 검증된 작품이 많이 올라갔다”며 “팬데믹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손실을 본 제작사들이 시장이 팽창하고 있는 시점에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 신작보다는 기존 인기작을 주로 올렸다”고 말했다.
관객의 선택에서도 ‘쏠림 현상’이 심화, 극심한 양극화를 드러냈다. 스타 배우가 출연하거나, 기존 베스트셀러 작품 위주로 관객이 몰린 것이다. 강력한 티켓 파워의 박효신이 출연한 신작 뮤지컬 ‘베토벤’, 홍광호를 앞세운 ‘물랑루즈!’, 김준수의 ‘데스노트’, 전미도의 ‘스위니토드’가 올 상반기를 이끌었다. 스타 파워는 연극계도 마찬가지였다. 배우 김유정 전소민 이상이 김상철이 출연한 ‘셰익스피어 인 러브’, 배우 박해수가 출연한 ‘파우스트’가 흥행 1, 2위에 올랐다.
대형 명작의 기세도 어김없이 확인했다. ‘캣츠’ 내한공연과 스테디셀러 ‘맘마미아’, ‘영웅’, ‘레미제라블’이 ‘브랜드 파워’로 밀어붙였고, 조승우와 만난 ‘오페라의 유령’, 김준수와 만난 ‘드라큘라’가 매진 신화를 썼다.
‘오페라의 유령’ [에스앤코 제공] |
다만, ‘규모의 성장’이 ‘내적 성장’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올해 뮤지컬 계는 그간의 고질병과 한계를 여과없이 드러냈다. 특히나 도전적인 시도와 실험을 하지 않는 작품들이 많았고, 신작 뮤지컬의 질적 수준은 4000억원 신화를 무색하게 했다.
지혜원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배우 중심의 대극장 작품 위주로 흥행을 이어갔지만 캐스팅에 따라 객석 점유율의 차이를 보였고, 대극장 창작 뮤지컬의 편수는 적었다. 중소극장 작품 중에 조기 폐막작도 나오는 등 고른 성장을 보이진 않았다”고 지적했다.
현재의 상황으로만 보면 국내 뮤지컬 업계는 총체적 난국이다. 10년 전부터 최정상 자리에 있던 몇몇의 스타 배우, 스타 연출자, 스타 음악감독이 지배, 일부의 ‘브랜드 파워’만 남은 시장이 된 상황이다.
지 교수는 “관객들도 대작을 선택하고 제작사도 실패 확률이 적은 안정적인 작품을 선택하는 환경이 이어지며 뮤지컬은 신선하고 새로운 것을 좇는 장르가 아닌 클래식으로 남는 장르가 되리라는 우려가 있다”며 “새로운 스타, 신진 창작진 발굴을 위한 다양한 지원을 통해 업계의 내실 다지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원 교수는 “2023년 뮤지컬 계는 신선한 시도가 없었던 한 해로 성숙도 측면에서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다만 그간 위축됐던 시장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한 징검다리의 역할을 한 해였다고 본다. 현실에 안주하기 보단 한계를 극복하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독자적인 산업의 동력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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