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이 처음 만난 건 1986년 ‘씨받이’였습니다.
▶임권택 감독=당시에 강수연양이 고교청춘물에 출연하고 있었어요. 연기력 좋은 아역배우 출신이었죠. 씨받이라는 영화의 여 주인공이 필요한데, 무슨 씨받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임신할 여자 데려올리는 없어요. 종가의 대를 이어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가임기인 열여섯에서 열여덟, 이런 나이를 골랐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요. 그런데 애를 낳고 떠났다가 애가 보고 싶어서 그 집 가까이 와서 자살을 했단 말이요. 이것은 열여덟 살이 감당해야될 세계가 아닌 거요. 엄청난 세월을 산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다 표현할 수 있는 열 여덟살. 그런 배우가 누구냐고 했을 때 강수연 양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거요.
▶강수연=그 때나 지금이나 감독님은 똑같으세요. 그 때는 제가 어려서 더 무섭긴 했지만. 지금이야 떼도 쓰고 농담도 하지요.
▶임=(혼잣말처럼) 지금은 내가 더 어렵고 힘들어.
-‘씨받이’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자연기상을 수상했는데, 한국영화에선 전례가 없던 큰 경사였지요. 그런데 시상식 현장에 두 분 다 안 계셨죠?
▶임=일본에서 들었어요. 한국영화 소개하는 행사가 있어서 베니스에서 바로 일본에 갔는데 마침 그 때 수상을 하게 된 거죠. 일본 사람들까지 ‘이렇게 큰 상을 받으러 가지 뭐하러 여기 왔느냐’ 하는 거요. 또 한국 신문들을 보면서 그렇게 큰 일을 다루는 게 겨우 이정도 밖에 안되느냐고 했어요. 당시 영화진흥공사 직원과 베니스영화제에 갔는데, 예산이 없다고 연락선 타고 들어가면 골목길에 있는 80불짜리 호텔방을 잡았어요. 철침대가 있는 방을 둘이 같이 썼지요. 화장실도 공동으로 쓰는. 그만큼 경험도 없고 융통성도 없던 거죠. 독일 방송국에서 만나자길래 갔는데, 어떤 여자가 나보다 먼저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심사위원장이라고 하는 거요. 그 여자가 “금년에 본 영화 중에서 ‘씨받이’가 가장 재미있고 좋았다”고 하기에 그 큰 상을 받을 줄은 모르고 면피용으로 작은 거 하나 받을 수도 있겠지 생각하고 일본으로 바로 갔어요. 저는 강수연양이 보나마나 상을 탈 리도 없고 하니까 가기 싫어서 안 간 줄 알았더니 영진공에서 연락도 안 했다고 하더군요.
▶강=저는 영진공 직원한테 전화받고 알았어요. 수상결정나자마자 전화를 했던 모양인데, “강수연씨가 여우주연상 받는다”고 하기에, 내가 너무 기가 막혀서 “왜? 왜? 왜 나한테 상을 줘?” 이럴 정도였다니까요.
◆한국영화의 거장과 ‘월드스타’의 탄생, 그리고 영광의 뒤안길
17일 임권택과 강수연의 동행 수원 한옥마을. 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
▶강=당시에 모스크바 영화제가 소련 개방 이후 국가적인 홍보전으로 대단한 행사였어요. 베니스에서 상을 탔으니까 한국 언론이나 관객들 기대도 굉장했지요. 감독상을 받냐 여우주연상을 받냐 이랬으니까요. 그런데 시상식 전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거에요. 감독님하고 저하고 호텔방에 모여 보드카 마시면서 못 받으면 실망할 텐데 일본에서 배타고 어떻게 조용히 들어갈까 이러고 있었다니까요. 드레스 잔뜩 넣어온 트렁크를 찢어 버리고 싶었어요.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주연한 영화가 연거푸 세계 굴지의 영화제에서 여우상을 받은 것은 그 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있기 어려운 기록인데.
▶강=감독님 덕분에 큰 상을 타서 너무 영광이죠. 그런데 너무 어린 나이에 받았기 때문에 부담감이 엄청났죠. 관객들은 절대적인 기대치가 있으니 저로서는 버거웠어요. 남들은 큰 상 받아서 좋겠다 했는데 정말 그 무게감에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했어요. 지금도 힘들고. 요즘 생각해보면 다행인 것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잡아준 거죠. 언젠가 술마시고 “나를 일찍 이렇게 만들어놨으니까 책임지라”고 감독님께 주정한 적도 있었어요.
▶임=당시에 강수연양이 상을 받고 나서 집사람(채령)이 걱정을 많이 했어요. 뭐인가하면 (강수연이) 이제 학교라도 가고 확실한 관리자가 붙어서 조심스럽게 해가야 하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알면 나라도 나설텐데 나도 몰랐던거요. 세계적으로 큰 배우가 됐는데 우리나라엔 아직 그런 사람이 없었으니 아무도 몰랐던거요.
-당시엔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영화제에 가면 어떤 반응이었나요?
▶임=‘만다라’로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1981년ㆍ경쟁부문)받으면서 사실상 임아무개라는 감독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 바로 ‘길소뜸’(1986년ㆍ경쟁)을 가지고 처음 베를린에 참석했어요. 그런데 느낌이 참담한 거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한국영화에 관심도 가진 사람도 없고 말이요. 질문이 대부분 “너네 나라에선 검열을 어떻게 하나”였어요. 그런 질문 받을 땐 나라 안 사정을 솔직히 대답할 수도 없던 거요. 정부 사람 따라붙고 하기 때문에…. 하늘에 대고 침뱉기이기도 하고. 한쪽에선 세계적으로 알려진 감독이 회고전을 하고 있는데 내 영화는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구나 이런 생각에 참담하기 짝이 없었어요.
▶강=모스크바영화제 때는 소련과 국교가 맺어지지 않았던 때라 비자를 만들려고 일본을 갔다가 다시 파리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어요. 출국 전에는 반공교육도 받았어요. 그렇게 하고 모스크바 공항에 내리는데 다들 거지꼴이었죠. 당시엔 “북한에서 납치해간다” 이런 루머도 있었고 상을 받고 나서는 “돈주고 상 타왔다” 이런 말도 들었어요. ‘씨받이’로 프랑스 파리에 가서 공식 인터뷰 하는데 유명한 프랑스 영화지 기자가 “(영화에서처럼) 여자가 그렇게 대우받는 사회에서 결혼해 살고 싶니?”라고 물어보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여기(파리)에 오기 전까지 프랑스 여자들은 다 잔다르크인줄 알았다”고 말했죠. 박수를 받았지만 그런 질문 받으면 비참해요. “너네 나라에서 배우하면 얼마받니?”, “남한에서 왔니, 북한에서 왔니” 이런 질문 많이 받았어요.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