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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된 천년의 바람엔 ‘孤雲’의 체취가…
라이프| 2011-11-17 11:00
최치원의 사무치는 외로움 곳곳에 서려

산비탈 고고한 소나무 푸른 빛 뽐내고

산수유 열매는 붉은 환청처럼 울리네…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니/세상에 날 알아주는 이 없네/창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신라 말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 선생의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당나라에서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던 그였지만 귀국 뒤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게 되자 외로움에 지은 시다.

경북 의성의 고운사(孤雲寺)는 최치원 선생이 한때 머물러 전각을 새로 짓고 이름을 개칭하는 등 그의 손때가 남아 있는 신라 고찰이다. 가을이 익어가는 이맘 때의 고운사는 등운산의 수려한 자태와 함께 유교ㆍ불교ㆍ도교의 화려한 옛 문화가 어우러져 절을 찾는 이에게 시간의 그윽한 멋을 선사한다.

의성군에는 고운사뿐 아니라 약재인 산수유 열매의 최대 산지 화전면 산수유마을의 산책길도 걸어볼 만하다. 봄의 산수유 꽃길도 아름답지만 가을의 산수유 열매는 붉은 보석마냥 매혹적인 빛깔을 뽐낸다.

또 사촌면 한옥마을은 손때 묻은 고택의 멋스러움이 남아 있어 조선 선비의 기백을 말없이 전하고 있다.

숨은 절경을 간직한 경북 의성군과 고운사의 가을을 돌아봤다. 

경북 의성군‘ 고운사’는 신라 말기 문장가 최치원 선생이 머물러 전각을 새로 짓고 이름을 개칭하는 등 손때가 남아 있는 고찰이다. 가을이 익어가는 이맘 때의 고운사는 등운산의 수려한 자태와 유교ㆍ불교ㆍ도교의 화려한 옛 문화가 어우러져 누구라도 넋을 잃게 된다.

▶최치원의 자취가 묻어나는 고운사…유ㆍ불ㆍ도교가 빚은 절경=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 절을 세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인 신라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사찰 이름은 처음에는 고운사(高雲寺)였으나 고운(孤雲) 최치원이 자신의 아호를 따 외로울 고(孤)자로 개칭했다.

고운사는 일반인에게는 이름이 낯설지만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 등지의 70여개 사찰을 관할하는 큰 절이다. 유명한 영주 부석사도 고운사의 관할에 있는 말사다.

일주문까지 들어가는 고운사 입구 100m 비포장 길은 1년 중 낙엽이 진 이맘 때가 절경이다.

길 양 옆으로 기운차게 뻗어 있는 계곡은 고궁의 잘 가꿔진 정원을 옮겨놓은 듯 수려하다는 말이 입에 맴돈다. 잡목을 제거하고 낙엽이 쌓인 둥그런 비탈에 고풍스러운 소나무만 미끈하고 멋스럽게 푸른 빛깔을 뽐낸다.

고운사는 여느 절과 다르게 유교와 불교ㆍ도교가 함께 어우려져 신라 고찰의 멋을 더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우선 사찰 경내에 자리잡은 유교의 전각 연수전(延壽殿)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주변의 사찰 건물과는 생김새가 많이 달라 전각을 잘 모르는 이도 쉽게 알게 된다. 이 연수전 터는 예부터 풍수지리상으로 최고의 명당자리다. 땅의 기운이 너무 세다고 해서 기를 누르려고 유교의 전각을 세웠다고 한다. 연수전엔 나그네가 나침반을 챙겨 들르곤 한다. 바늘이 멈춰서서 꼼짝 않는 신기한 기체험을 위해서다.

도교의 흔적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종무소 뒤 만덕당 기둥 옆에 걸터앉아 하늘을 쳐다보면 고운사를 품고 있는 등운산 봉우리가 보인다. 등운이란 뭉게구름으로 도교적 의미다. 최치원이 세웠다는 가허루나 우화루 역시 도교의 신선이 타고 다니는 비행체의 이름이다. 

▶가을의 붉은 보석 화전리 산수유마을=산수유마을은 노란꽃이 피는 봄이 아름답지만 깊어가는 가을도 꽤 멋스럽다.

천지가 온통 부끄러운 새색시 볼마냥 발그레하다. 야트막한 구릉지대는 개울따라 밭둑길 논둑길이 온통 3만여그루의 산수유나무 군락이다. 가지마다 올망졸망 맺힌 보석이 마을 입구에 들어선 나그네를 맞이했다.

아랫마을인 전풍마을과 윗마을인 숲실마을까지 펼쳐진 3㎞ 산수유길은 여느 올레길처럼 변화무쌍하지는 않지만 산수유 열매 빛깔을 머금은 가을 향기가 소담스럽다.

개울물에 발을 담근 기암이 산책로 내내 펼쳐지면서 산수유길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다.

화전리는 전국 최대의 산수유 생산지답게 산수유 생산량도 경북의 80%, 전국의 40%를 차지한다. 산수유나무는 중국산 산수유 열매가 수입되기 전까지는 대학나무로 불렸다. 산수유나무 몇 그루만 있어도 집집이 자식 학비 걱정을 덜어주는 보배였다.

산수유마을은 노란꽃이 피는 봄이 아름답지만 깊어가는 가을도 꽤 멋스럽다. 천지가 온통 부끄러운 새색시 볼마냥 새빨갛다. 야트막한 구릉지대는 개울따라 밭둑길, 논둑길이 온통 3만여그루의 산수유나무 군락이다.

▶조선 선비의 기백이 서린 사촌리 한옥마을=화전리에서 산수유 열매 빛깔에 넋을 잃었다면 사촌리 한옥마을에선 조선 선비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고택 20여채가 남아 있는 사촌마을은 허난설헌의 남편 김자첨 등 안동 김씨와 풍산 유씨가 이주하면서 수백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왔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는 경북 의병의 본거지 중 하나였다.

마을 입구의 만취당은 조선 선조 때 건물로 곳곳이 낡고 오래된 세월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하지만 손을 댄 곳이 없어 고택의 멋이 그대로 살아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마당에서 마루를 들여다보면 마루 벽에 난 창문 사이로 뒤뜰의 고풍스러운 전경이 속살 엿보듯 펼쳐진다.

만취당 옆에는 수령이 500년 된 향나무(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107호)와 한 선비가 연산군 때 낙향해 은둔생활 중 지은 영귀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4호)이 남아 있다.

심형준 기자/cerju@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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