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기사
일본인 두가지 명함에 희망 담다
뉴스종합| 2011-11-21 06:56
#1. 비즈니스 미팅에서 반갑게 명함을 건네는 이케다 요헤이(池田陽平ㆍ27) 씨. 그는 지난 여름부터 두 개의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하나는 본래 직장인 후생노동성 명함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젝트 유이(結)’라는 동북지방 어린이를 지원하는 봉사단체의 명함이다. 동북 3개 현(이와테ㆍ미야기ㆍ후쿠시마)은 지난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2. 도쿄에 살고 있는 후쿠요시 다카유키(福吉隆行ㆍ27) 씨는 자신을 은행 직원이자 벤처기업 지원가라고 소개한다. 그 역시 일본정책투자은행과 소셜벤처파트너스(SVP)도쿄라는 두 개의 명함을 갖고 있다.

후쿠요시 씨는 SVP에서 자신의 전문지식을 활용해 비영리단체(NPO)에 자금을 원조하거나 운영 노하우를 전해주고 있다.

그는 “은행 측에는 (SVP 활동에 대해) 이미 보고를 마쳤다”며 “SVP의 경험이 본업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일본에서 두 개의 명함을 가진 직장인이 늘고 있다. 그동안 회사의 겸업 금지 방침에 따라 다른 일을 한다고 해도 비밀로 했지만 요즘은 떳떳하게 밝히는 추세다. 열도 ‘투잡족’의 커밍아웃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프로보노’를 아시나요=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와 관련해 “자신의 전문성을 사회적 약자를 돕는 데 활용하는 ‘프로보노(pro bono) 운동이 미국과 유럽을 거쳐 일본에도 상륙했다”고 보도했다.

프로보노는 ‘공익을 위하여’라는 뜻의 라틴어(pro bono publico)의 줄임말로, 미국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한 무료 법률서비스로 처음 시작됐다. 이후 법률뿐만 아니라 의료ㆍ교육ㆍ경영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행하는 봉사활동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자신의 전문지식을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일반 봉사활동과 구별된다. 일본에서는 이미 전국적으로 수만명이 프로보도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지난 3월 열도를 뒤흔든 대지진은 ‘프로보노’ 운동에 불을 댕겼다. 위기에 처한 일본을 구하는 데 자신도 일조하고 싶다는 사람이 삼삼오오 늘어난 것이다.

직장인의 봉사활동을 지원하는 NPO 단체인 ‘두 번째의 명함’의 히로 유키(廣優樹ㆍ31) 이사는 “대지진 이후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며 “이들은 봉사활동에 올인하기보다 직장생활 중 짬짬이 봉사하는 것에 더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회사도 환영하는 분위기다. 통신ㆍ전자기기 대기업 NEC는 “사외 활동을 통해 새로운 발상을 얻는다면 회사 입장에서도 플러스”라며 “다양한 사람과 교류함으로써 조직 운영이나 관리직에 필요한 훈련을 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사회공헌 여부와 상관없이 직원에게 ‘제2 명함’을 갖게 하는 회사도 있다. 바로 일본 대표 이자카야 ‘와타미’다. 이 회사는 사원에게 자신의 꿈을 담은 ‘미래의 명함’을 가지라고 적극 권장한다. 와타나베 미키(渡邊美樹ㆍ52) 회장은 “꿈을 가진 사람이 입사하는 것은 기업에도 큰 활력”이라며 “사원이 독립하고 싶다면 회사가 지원하는 시스템도 마련해 놓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도시샤(同志社)대학의 오타 하지메(太田肇ㆍ56) 교수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본업과 경쟁관계에 있지 않은 한 겸업을 허용하고 있다”며 “경영자도 회사에만 충성하는 직원보다 사회나 고객을 직접 접하는 직원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나? 이런 사람이야=두 개의 명함은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수단으로도 인기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무엇보다 눈에 띄는 ‘미니 자기소개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자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한 30대 여성은 직장 명함과 별도로 자신이 취미로 그린 일러스트가 담긴 개인 명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회사 명함을 건네면 회사가 주목받지만, 일러스트 명함을 내밀면 나와 내 작품에 관심을 가져준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간사이학원대학의 스즈키 켄스케(鈴木謙介ㆍ35) 부교수는 “사내 연공서열이 무너지면서 연차에 따른 자동적 수입 증가를 기대할 수 없게 됐고, 이에 따라 ‘회사=인생’이란 공식도 사라졌다”며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작품을 명함에 드러내는 것은 자기 표현의 유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고 평했다.

심각한 취업난도 ‘두 개의 명함’에 일조했다. 최근 일본생산성본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신입사원 중 “정년까지 근무하고 싶다”는 응답은 33.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또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응답도 70%를 넘어섰다.

스즈키 교수는 “직장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자아실현이나 사회공헌을 하고 싶어하는 직장인이 많아지고 있다”며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데 2개의 명함이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천예선 기자/cheon@heraldcorp.com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