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무기교의 기교…가구, 울림이 되다
라이프| 2012-02-28 09:39
조선시대 낡은 목기소반

프랑스 탁자와 절묘한 조화


기교 벗어던진 궁극의 정교함

쓰임으로써의 본질 되찾아


모든 게 ‘과잉’의 시대다. 

특히 표현의 과잉은 어지러울 정도다. 현대미술이 그렇고, 디자인이 그렇다. 

무언가를 덧대고 첨가하기는 쉬워도, 끝없이 덜어내면서 특화된 예술세계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꼭 필요한 정점의 것만을 추린 절제미에 더 마음이 끌린다. ‘뺄셈의 미학’을 보여주는 한 독특한 전시현장을 찾아가봤다.

▶신선하게 다가오는 ‘동서융합의 장’= 하나 둘 셋. 둥근 목기소반 세개가 벽에 걸렸다. 콩땜을 한 한옥 사랑방에 놓이면 제격일 법한 단정한 소반들이다. 느티나무를 깎아 만든 검붉은 소반, 한지를 꽈서(지승) 칠을 한 소반, 한지풀로 틀을 만들고 옻칠을 한 소반. 모두 군더더기라곤 하나도 없는, 달덩이 같은 조선시대 소반들이다. 얌전하게 생긴 소반들을 ‘턱’하니 벽에 붙인 것뿐인데 세련된 현대조각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멋지다. 그림자도 한몫 한다.

소반 옆에는 프랑스가 사랑하는 디자이너 마르탱 세클리(56)의 진홍빛의 납작한 탁자가 놓여졌다. 금속 상판의 붉은 칠 마감이 아찔할 정도로 완벽하다. “여보게들, 모든 걸 덜어낸 미니멀리즘이란 바로 이런 것이요”라고 하듯 최고의 정점만 보여준다. 조선시대 낡은 목기소반과 최첨단 기법으로 제작된 프랑스 탁자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랑스런 공간이 됐다.

서울 소격동의 학고재갤러리(대표 우찬규)가 기획한 ‘디자인의 덕목(The Virtue of Design Furniture)’전은 이처럼 뜻밖의 조합들로 이뤄진 전시다. 한옥 갤러리에 세련되기 이를 데 없는 현대 디자인가구들이 여러 점 들어섰고, 추사 김정희의 고졸한 현판(탁본)에는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 샤르팽의 매끈한 알루미늄 선반이 곁들여졌다.

또 당당하게 생긴 강화반닫이 위에는 독일 미술계가 주목하는 유망작가 팀 아이텔의 우수 어린 작은 그림이 걸렸다. 어울리지 않을 듯한 디자인가구(6점), 조명(3점), 고미술(9점), 회화(6점)는 참신한 동서 융합을 보여준다.

전시에는 전통민화인 책가도, 추사 김정희의 판전 현판탁본과 유럽 출신으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디자이너인 헬라 용에리위스, 부훌렉 형제, 마르탱 세클리의 가구와 조명이 어우러졌다. 광택과 무광택, 소란스러움과 깊은 고요가 서로 기묘한 화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검은 서랍장을 계단처럼 연결시킨 스웨덴 프런트디자인의 ‘마술’ 연작 ‘Divided sideboard’. 왼쪽 세 덩이가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게 디자인의 묘미다.                        [사진제공=Galerie kreo]

▶실용성과 심미성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디자인은 쓰임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순수미술과 구별된다. 당연히 심미성과 함께 실용성을 요한다. 이번 전시에선 실용성과 심미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사례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단순함에 관심을 기울인 가구들은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해 대상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즉 물건으로써의 쓰임새를 극대화하되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하고, 뛰어난 미적 완성도를 지니면서 동시에 과감히 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 단색조의 명징한 회화들이 한몸처럼 내걸렸다. 

일례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디자이너인 마르탱 세클리, 피에르 샤르팽, 프런트 디자인팀은 꼭 필요로 한 요소들로만 가구를 완성했다. 물론 헬라 용에리위스와 부훌렉 형제는 직선의 기하학적 질서에선 느낄 수 없는 유기적인 선들의 질서체계를 통해 독특한 서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벽면에 걸린 조선시대 둥근 소반 뒤로 이우환의 회화가 보인다.

이들 가구에 어우러진 이우환, 정상화, 천원지의 모노크롬(단색조) 회화는 가구들이 지닌 뺄셈의 미학을 더욱 상승시키며 방점을 찍고 있다. 이 경지에 이르면 단순함은 ‘궁극의 정교함’이 된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혼란에서 벗어나, 풍요롭고 깊이 있는 사색의 시간을 마주할 것을 나직이 속삭인다.

전시를 기획한 우찬규 대표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현판)는 이번 전시의 핵심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기교가 느껴지지 않는 굵은 필획은 일평생 온갖 필체를 연마한 끝에 결국 그 모든 것의 근본을 이루는 ‘기본’으로 돌아갔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전시는 3월 20일까지. (02)720-1524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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