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 경제 미분류
반상 위의 선비, 정수현
헤럴드 경제 미분류| 2012-09-13 09:58
‘소년 실력자’ 소리 들으며 운명처럼 충암高 진학…1기 프로신왕전서 끈질기기로 유명했던 강훈 프로 꺾으며 승승장구

바둑의 기본은 영토싸움, 시장놓고 다투는 기업과 닮았지…기업도 바둑도 천적 앞에서 스타일 바꿔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어

바둑 속엔 인내·끈기·양보·배려 모든 게 녹아있어…정규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면 아마 왕따문제도 해결될 걸

독도문제야 말로 가장 냉정한 수읽기가 중요해…독도연구소설립·바둑교육체계 완성 등 내 욕심은 끝이 없어, 허허.


정수현(56)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교수. 바둑 프로 9단인 그는 젊은 세대라면 좀 생소한 인물일 수 있지만, 어느 정도 나이든 바둑 마니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바둑 명문 충암고 출신으로 ‘충암사단’의 개척자인 그는 바둑기사로서의 무리하지 않는 ‘신사의 기풍’으로 명성도 남다르지만, 1980년대 중반~90년대 중반 텔레비전 바둑 중계 해설자로 이름을 날렸다. 바둑 마니아라면 차분하면서도 논리적인, 매우 정갈했던 그의 해설을 기억한다. 당대 유명한 해설자인 윤기현 전 국수가 유머와 재치의 입담을 과시했다면, 정 교수는 ‘반상(盤上)의 교수’로 불리며 과학적인 해설의 진수를 보여줬다. 정 교수는 그래서 ‘바둑계의 허구연’으로 불렸고 ‘바둑계의 하일성’으로 비견되던 윤 전 국수와 더불어 바둑해설 1세대의 길을 걸었다.

그가 16년 전 세계 처음으로 창설된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발탁되며 ‘바둑교수 1호’가 된 것도 이 같은 경력과 무관치 않다.

프로 기사로, 바둑학과 교수로 삶을 개척해 온 그는 최근 들어선 인기 강사로서의 입지도 넓히고 있다. 인문학적 감성, 바둑과 경영ㆍ교육학의 접목 강연이 필요한 기업이나 단체가 정 교수에게 잇따라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특히 그는 최근 삼성 사장단회의에서 ‘바둑과 경영’ 강연을 하며 눈길을 끌었다.
 
바둑계의 기둥인‘ 충암사단’의 1호 프로기사, 세계 최초의 바둑학과 교수 등의 남다른 경력이 있는 정수현 교수는 바둑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바둑의 오묘한 진리를 탐구해 사회에 전파하는‘ 학자’로서의 삶은 그의 즐거움, 그 자체다. 인터뷰를 위해 모처럼 기원을 찾은 정 교수가 힘차게 착점을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정 교수는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바둑은 인생이고, 교육이고, 경영이고, 나눔이다”라며 “끈기와 인내, 배려와 양보, 적절한 포기와 적절한 실리, 통 큰 조화를 추구하는 바둑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만물의 오묘한 진리가 담긴 바둑을 세상사에 접목하면 무궁무진한 지혜와 슬기로운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바둑의 전도사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이유를 함축한다.

앞으로 할 일도 많다. 국가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두뇌스포츠 강국에 일조하기 위해 많은 아이디어를 실행하고 싶고, 또 한ㆍ일 간 시끄러운 독도 문제를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연구기관인 독도연구소도 만들 구상을 하고 있다.

왜 그는 이렇듯 바쁘게 사는 것일까. 삶의 대부분을 바둑의 오묘한 진리를 터득하는 데 보냈고, 그 오묘한 진리를 사회와 접목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그의 바둑인생을 들어봤다. 인터뷰는 교대역 부근의 ‘우석 기원’에서 이뤄졌다.

▶반상으로 날 이끈 것은 호기심=정 교수의 고향은 전북 남원이다. ‘춘향의 고장’인 남원은 예부터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로 이름났다. 각각 ‘하늘이 고을을 정해 준 땅’ ‘비옥한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다’는 뜻이다. 바둑판과 같이 정돈된 듯한 넓은 땅, 정 교수가 바둑세계에 발을 들인 것은 고향의 정취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정 교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너무 평범해 별로 소개할 게 없다고 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어요. 다만 공부를 좋아했고 상상하는 것을 즐겼죠.”

좀 색달랐다면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쓴답시고 글을 끄적이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은 만화를 잔뜩 그렸는데 어머니에게 들켜 혼쭐이 났다고 한다. 머슴애가 이상한 그림만 그리고 있다고 단단히 혼났다.

바둑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중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 형으로부터 배우게 됐다. 처음 본 바둑은 강렬했다. 호기심이 새록새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너무 재미 있었다. “책을 사서 열심히 봤어요. 잡지 기보 등을 밤새워 본 적도 있습니다.”

어느새 실력이 늘었다. ‘소년 실력자’라는 소문도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 자연스럽게 막연히 바둑 프로기사를 동경하게 됐다.

정 교수가 충암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 것은 정해진 코스(?)였다. 충암고는 1971년 국내 최초로 바둑부를 창설했다. 바둑부가 생기자 김수영 사범 등을 앞세워 충암고는 전국의 바둑영재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 영재 중 하나가 정 교수다.

“아버님은 시골 분이었지만 자식이 원한다면 ‘네가 알아서 하라’고 믿고 맡기는 분이었습니다.”

남원중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서울로 유학을 왔다. 허장회(충암고 3회), 정수현(4회), 문용직(6회), 양재호(11회) 프로와 유창혁, 김영환 프로 등 훗날 바둑계를 평정한 ‘충암사단’의 맥은 이렇게 태동했다.

“당시 한국기원 원생으로도 들어갔는데, 그 무렵 원생제도가 무너져 ‘나홀로 연구생’을 하기도 했어요. 죽어라 했는지, 그러다 운이 좋아 1973년 입단대회에서 초단이 됐지요.”

바둑을 배운 지 정확히 3년9개월 만이었다.

충암고 바둑영재 스카우트 1호였던 고등학교 1년 선배인 허장회 프로보다도 앞서 입단한 것으로, 충암고 최초의 바둑 프로기사가 된 것은 어쩌면 그 같은 열정과 성실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는 원생 시절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12시까지 쉬지 않고 바둑공부를 한 적이 많았다. 힘들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바둑을 원 없이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바둑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전략을 연구했다. 옛날 두었던 바둑은 지금도 누렇게 변색된 종이 위에 기록돼 있다.

“제가 처음 프로 입단대회에 나갔을 때 누구도 입단하리라 예상한 이는 없었습니다. 제가 짧은 기간에 입단에 성공한 것은 머리가 좋아서도,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도 아니었죠. 바둑을 너무 좋아해 공부하는 데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프로기사로서의 정점은 1986년이었을 게다.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당시 강훈 프로와 3번기를 해 2대 1로 이겼습니다. 끈질기기로 명성이 자자했던 강훈 프로 기풍에 맞서 간신히 이긴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SBS바둑최강전 준우승(93년), KBS 바둑왕전 준우승(99년) 등 프로기사로서 후회 없는 성적을 남겼다.

“그런데, 치열한 전투세계보다는 아마 지도사가 제 숙명이었나 봅니다. 반상의 해설자로, 또 바둑의 지평을 넓히는 바둑교수로 길을 걷게 된 것은 바둑의 세계를 널리 알려야 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에게 바둑은 □□이다=정 교수의 좌우명은 ‘불성무물(不誠無物)’이다. 성실이 없는 곳에 존재는 없다는 뜻이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것으로, 한때 정 교수가 중요한 게임에선 이 글귀가 새긴 부채를 부치며 한점 한점 착점하기도 했다. 성실한 인생을 모토로 삼았기 때문일까. 반상에 임할땐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끈기있게 승부했고 바둑판 밖에서는 늘 공부했다.

바둑판에 매달려 대학에 뜻이 없던 일부 프로기사들과 달리 그가 한양대 영문학과로 진학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바둑계의 드문 ‘영어 고수’가 된 배경이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특이한 구석이 있었어요. 영어의 고전인 안현필의 ‘영어실력기초’를 손에 놓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가 16년 전 명지대가 만든 세계 최초의 바둑학과 교수로 자리를 잡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세계 첫 ‘바둑학과 1호 교수’ 타이틀을 얻게 됐다. “당시 고건 명지대 총장과 일부 학과 교수들이 모여 바둑학과를 창설하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어찌하다 보니 제가 교수로 가게 된 거지요.”
 
정수현 교수가 착점하는 동안 그의 선배 프로기사인 정동식 사범이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바둑학과를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하는 것은 정 교수의 몫이었다. 바둑 커리큘럼과 분야, 교과서를 만드는 데 정열을 바쳤다. 15년 역사의 명지대 바둑학과는 그의 일조 덕에 숱한 바둑계 인사를 배출했고, 지금은 미국ㆍ독일ㆍ중앙아시아 학생들이 유학을 올 정도로 유명해졌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후학을 키우는 것이 너무도 소중하지만, 바둑의 진리를 세상 밖으로 퍼뜨리는 일은 어쩌면 캠퍼스로는 작았을까.

정 교수는 최근 외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인기있는 외부 강연자로서의 행보다. 그에게 기업들과 단체들은 바둑판과 영감이 어우러진 바둑 강연을 해달라고 연신 러브콜을 보낸다. 정 교수가 단골강사로 초빙을 받고 있는 것은 그의 왕성한 저술활동과 관련이 크다. 

그는 ‘바둑학 개론’ ‘컴퓨터 바둑’ ‘바둑학습의 효과’ 반상의 파노라마’ ‘인생과 바둑’ 등 30여권을 저술했다. 특히 2009년에는 ‘바둑읽는 CEO’를 출간, 경영계로부터 “바둑을 경영으로 끌어올린 의미있는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바둑 해설가와 교수로 일하면서 출판사로부터 많은 제의를 받았고, 바둑에서 얻은 교훈을 책으로 정리하다 보니 꽤 많은 책을 내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같이 바둑의 산 경험을 인생사나 경영ㆍ교육과 접목한 이론을 정리하다 보니 그의 차분한 입담(?)을 인정한 이들로부터 강연을 의뢰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 언론에서 운영하는 HiCEO에서 ‘바둑과 인생’이라는 주제로 직장인들에게 바둑에서 배우는 인생의 지혜를 강의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특히 정 교수는 지난 7월에는 내로라하는 이들이 포진된 삼성사장단 앞에서 ‘바둑과 경영’ 주제의 강연을 해 경영계로부터 시선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바둑은 경영과 꽤 닮았고, 바둑에서 주는 시사점을 경영에 접목하면 좋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관심들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정 교수가 말하는 ‘바둑과 경영’은 이렇다. 기본적으로 마켓(시장)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기업경영은 바둑의 영토싸움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고, 특히 미래를 예측하며 의사결정을 하는 매커니즘이 중요한데 이는 바둑의 수읽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바둑은 돌 놓는 게 바로 의사결정이며 목표를 분명히 하고 각 대안에 따른 미래를 예측하고 판단해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기업 의사결정과 닮은꼴”이라며 “특히 바둑에선 ‘대마를 무겁게 하지 말라’ ‘사석전법을 잘 써라’ 등의 말이 있는데 기업의 활력 제고와 마케팅 전략과 관련해 유용하다”고 설명했다. 또 “조훈현 9단의 경우처럼 바둑 초고수는 천적이 출현할 때 스타일을 바꾸는데, 이는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려면 기존의 스타일을 고수해선 안 된다’는 뜻으로 글로벌 기업이 배워야 할 점”이라며 이같이 바둑을 응용하면 매우 위력적인 경영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경영 관련 강의만 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는 바둑과 인생 철학을, 보험 등 특별단체 앞에선 바둑과 관련된 응용철학을 강연하곤 한다.

정 교수가 대중들 앞에서 바둑의 오묘한 힘과 무한대의 응용력을 설파하는 것은 바둑의 전파는 저마다 인생을 알차게 만들고, 현명하게 사는 법을 알게하고, 궁극적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길이라는 신념 때문이다. 수가 무궁무진해 아무리 두어도 질리지 않는 창의성과 예술성이 담긴 바둑, 흥미로운 여가수단이면서도 교훈과 지혜를 주는 예도인 바둑은 우리 사회에 ‘맑은 물’을 제공하는 두뇌스포츠라는 것이다.

“며칠 전 전국장애인바둑협회장과 만나 얘기를 나눴는데, 그 분이 그러더라고요. ‘바둑을 두는 우리 아이들 중에는 폭력적인 아이도, 사고를 치는 아이도 없다’고요.”

바둑을 두게 되면 인내와 끈기, 양보와 배려, 예와 의를 중시하게 돼 자연스럽게 폭력은 낄 틈이 없다는 뜻이다. “어쩌면 인터넷 시대인 요즘, 문제가 되는 청소년 폭력과 각종 흉악한 범죄도 바둑이 퍼지면 많이 희석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자신을 원하는 계층 어디나 달려가며 그동안 배운 바둑인생을 아낌없이 들려주는 이유 중 하나다.

▶기풍은 무욕(無慾), 그러나 바둑 전도사로선 욕심꾼=‘프로기사 정수현’의 기풍은 어떨까. 그는 ‘무욕’을 강조한다. “바둑판에 앉으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상대방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둑이 보이죠.”

프로기사로서는 무욕주의자(?)이지만, 바둑 전도사로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욕심이 넘친다.

일단은 바둑 교육가로서의 의욕이다. 우리나라가 쟁쟁한 프로기사들의 활약에 의해 한ㆍ중ㆍ일 최강의 바둑강국이 됐고, 국가경쟁력에 일조하는 스포츠 역할을 하고 있지만 바둑교육의 체계는 미흡하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따라서 바둑교육 커리큘럼, 교수법, 평가방법 등 능력있는 지도자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시스템을 마련해 누구나 바둑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데 일조하고 싶단다.

또 21세기 들어 부각된 바둑ㆍ체스ㆍ장기ㆍ브리지ㆍ체커스 등 ‘두뇌스포츠(Mind Sports)’를 통합해 한국을 두뇌스포츠 강국으로 만들고 싶단다. “장기적으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같은 두뇌스포츠 기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요즘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한ㆍ일 간 외교문제로 비화된 독도를 수호하는 파수꾼이 되고 싶단다. 정 교수는 독도연구소를 설립할 계획이다. 최근 명지대에 독도연구소 설립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명지대가 받아주면 명지대 내에 독도연구소를 만들고,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외부에서 연구소를 설립할 생각도 있다.

“제가 보기엔 독도문제는 4~5년에 한 번씩 거론되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독도가 우리 것이라고 주기적으로 주장하지요. 그 때마다 우리는 벌떼같이 일어나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조금있으면 또 잊어버리곤 하지요. 그건 안됩니다.”

정 교수는 독도문제 등 국가의 미래전략에 관한 일은 학교 내 혹은 외부에 연구소를 설립해 사회봉사 차원에서 꾸준히 연구하려 마음을 먹고 있다.“독도문제는 전략적으로 치밀하게 분석하고 대응책을 세워야 하는데, 우리는 감성적으로 접근해 이런 면에서 미흡한 것 같아요. 바둑으로 치면 상대방의 도발적인 수에 화가 나 냉정하게 수읽기를 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는 전략을 찾을 필요가 있고, 문화콘텐츠를 통해 널리 알리는 방법 등을 모색해야 한다는 게 정 교수의 주장이다.

정 교수는 외교전문가, 군사전문가, 문화전문가들과의 유기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독도수호에 관한 전략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해 실행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물론 여기에 사용하는 사용하는 정보수집, 미래예측, 전략도출 등의 방법론은 바둑 모델을 활용해 추출하겠다는 것이다.

“인생도, 경영도, 또 독도문제도 포석과 포석이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며 조화를 추구하고 합리적인 전략을 택할때  잘 풀리는 게 아닐까요. 물론 어려운 얘기죠.”

이렇게 반문하며 정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이득현의 시(詩), ‘바둑 이야기’를 인용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다 잡아 놓은 말이 꿈틀거리고
다 죽었던 말이 구사일생한다
인간만사가 새옹지마라
하지 않던가
후회해야 소용이 없다.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가
이리도 어려울까
인간사가 다 이러하노라

김영상 기자/ys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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