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치열한 삶의 밑바닥에서 길어올린 목소리가 건네는 위안
엔터테인먼트| 2012-12-26 14:05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몰라서 못 듣거나 듣지 않을 순 있다. 그러나 일단 한 번 찾아 들은 이상 끊을 수가 없다. 가슴 속 밑바닥을 얼마나 박박 긁어모으면 이런 목소리가 나올까. 즐거울 땐 까맣게 잊어버리다가도, 울적할 때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목소리다. 강허달림의 목소리가 그러하다. 연말 공연을 앞둔 강허달림을 홍대 인근 주점에서 만났다.

강허달림은 아는 사람들은 너무 잘 알고,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 모르는 블루스(Blues) 계의 대표 디바다. 블루스는 록과 알앤비 등 주류 팝의 토대인 뿌리 깊은 장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블루스는 사교춤 ‘부르스’나 춤의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트로트로 종종 오해받는 소외된 장르다. 강허달림의 음악은 설명의 편의상 가장 교집합이 많아 보이는 블루스로 분류되고 있다. 대놓고 블루스를 표방하는 뮤지션이 많지 않다보니 언젠가부터 강허달림은 대한민국 대표 블루스 뮤지션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강허달림은 ‘블루스 디바’란 말로 주변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현실을 경계했다.

“뮤지션이 스스로 자신의 음악을 특정 장르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 등 우리 소리를 꾸준히 접해왔어요. 발성에도 그런 영향이 많이 남아있고요. 사실 처음부터 블루스 음악을 해야겠단 생각으로 음악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요. 블루스 마니아들이 현학적으로 줄줄 꿰는 사조 같은 것에도 관심 없었고요. 블루스란 글을 읽지 못하고 악보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음악 아닌가요? 그냥 사람들이 제 음악을 장르로 한정 짓지 말고 그저 ‘강허달림’ 음악으로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장미는 장미란 단어 때문에 존재하나, 동시에 그 이미지는 화사한 아름다움으로 제한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미의 생태와 종류 등에 대해 무지하다. 장미란 단어가 장미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셈이다. 강허달림의 변은 그런 맥락으로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허달림의 음악이 블루스로 분류되는 이유는 그의 지난 삶 자체가 상당히 블루지하기 때문이다. 블루스 자체가 흑인 노예들의 고된 삶에서 비롯된 장르 아니던가? 강허달림의 지난 삶 또한 만만치 않은 삶이었다.


▶ 음악, 너는 내 운명= 강허달림의 고향은 지금은 전라남도 순천시에 통합된 옛 승주군 상사면 용계리 죽전마을이다. 순천시에서 40분은 더 들어가야 하는 ‘깡촌’이다. 강허달림은 실은 실향민이다. 주암댐 건설로 태어난 마을이 수몰됐기 때문이다. 강허달림의 부모는 나라에서 나가라고 하니 당연히 나가야되는 줄 알았다. 강허달림은 순순히 집터를 내줬던 지난날을 아쉬워하며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온 동네를 쏘다니던 개구쟁이였어요. 무엇보다도 노래를 잘했어요. 특히 명절 때 동네 노래자랑은 제 독무대였죠. 그때 불렀던 노래가 ‘눈물 젖은 두만강’이고요. 어린애가 그 노래를 부르니 어른들 눈에 얼마나 귀여웠겠어요? 초등학생 때엔 나름 공부도 잘해서 무서운 것이 없었죠. 하면 뭐든 될 줄 알았죠.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 환갑잔치 선물로 들어온 텔레비전이 들어왔는데, 그때 이선희의 ‘그대여, 잘못은 내게 있어요’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때부터 가수를 꿈꾸기 시작했죠. 단 한 번도 그 꿈을 버리지 않았기에 지금 여기까지 온 거죠.”

깡촌에선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왈가닥 소녀였지만 시내에선 달랐다. 진학한 순천시의 중학교엔 자신보다 공부를 잘하고 예쁘고 옷도 잘 입는 또래들이 넘쳐났다. 순천시내에서 강허달림은 말 그대로 ‘촌년’이었다. 반 친구들과 어울리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가수에 대한 꿈 때문이었다. 순천여상으로 진학한 이유도 학교에 기타 중창반이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기대에 부풀어 진학한 고등학교. 그러나 중창반은 기타를 가진 학생만 받았다. 하는 수 없이 연극반에 들어갔다.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할 때마다, 노래하고픈 욕구는 간절해졌다.

고3에 무렵에 4000원짜리 기타를 마련한 강허달림은 그길로 음악학원에 등록했다. 때마침 KBS가 청소년 가요제를 열었다. 그는 원장을 조른 끝에 곡 하나를 받아냈다. 노래를 녹음해 서울로 보낸 테이프는 3차 예선까지 통과, 본선 진출자 리스트에 올랐다. 비록 마지막 관문에서 떨어졌지만 큰 용기를 준 경험이었다. 


▶ 음악적 밑거름이었던 고된 시간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강허달림은 기타를 둘러메고 무작정 상경했다. 노래도 좋지만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급했다. 첫 밥벌이는 직원 다섯 명인 장판 회사의 경리였다. 월급은 30만 원이었다. 처음 계획은 매달 월급에서 24만 원을 떼어내 3년 간 적금을 부어 1000만 원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작은 회사다보니 사장이 제 멋대로였어요. 저는 사장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달라고 따졌어요. 결국 2개월 만에 잘렸죠.”

고졸 여성의 운신의 폭은 생각보다 많이 좁았다. 대학에 진학해야겠단 생각에 2년 동안 입시를 준비했다. 캠퍼스 생활과 음악공부를 함께할 수 있는 서울예전에 진학하고 싶었다. 쉽지 않았다. 한 전문대 건축과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모자랐다. 마침 신설된 실용음악학원 서울 재즈아카데미에서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등록금으로 모자랐던 돈으로 재즈아카데미에 보컬과 입학했다. 그때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뒤늦은 정식 음악교육의 시작이었다.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강허달림에게 재즈아카데미는 좌절의 공간이었다. 동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현란한 테크닉으로 강허달림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판소리를 닮은 그의 발성은 낯설어했다. 의기소침해 있던 강허달림에게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이 있었다. 1996년 12월 28일, 가수 한영애가 재즈아카데미에서 특강을 벌였다. 한영애는 학생들에게 “우리 소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며 “보컬은 자기만의 색깔을 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준 사건이었죠. 저는 재즈아카데미 2기에 재등록한 뒤, 청소부를 자청해 생활비를 벌었어요. 동기들이 스탠더드 팝이나 재즈를 부를 때 저는 발성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다가 ‘보컬 리뷰’란 수업에서 처음으로 동기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겼어요. 그때 부른 곡이 소나무의 ‘꿈꾸는 그대는 내 맘을 아는지’였습니다. 노래를 마치고 나니 강사분께서 “지금까지 수업 중 온전히 자기 느낌을 실어 노래한 사람은 처음”이라고 칭찬해 주시더군요. 자신감이 생겼죠.”


▶ 뒤늦게 펼친 날개로 활짝 날아오르다= 서울 재즈아카데미 보컬 과정을 수료한 강허달림은 페미니스트 밴드 ‘마고’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강허달림의 음악여정을 뒤돌아보면, 그가 ‘마고’에 남긴 발자국은 희미하다.

“노래를 시켜준다고 해서 들어갔던 밴드예요. 사실 저는 페미니스트가 뭔지도 잘 몰랐어요. 지금도 페미니스트가 아니고요. 각종 여성단체 행사에 불려 다니며 공연을 펼쳤지만 제가 원했던 음악은 아니었어요. 별다른 활동 없이 밴드에서 탈퇴했지만, 소중한 것 하나를 얻어서 나왔어요.”

‘마고’ 활동을 통해 강허달림은 ‘부모성 함께 쓰기’에 대해 알게 됐다.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했던 그는 어머니의 성(姓) ‘허’를 함께 쓰기로 결심한다. 이후 그는 ‘공경할 경(敬)’에 ‘순할 순(順)’을 딴 본명 ‘경순’ 대신, 꿈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리고 싶단 의미를 가진 ‘달림’이란 이름에 어머니 성을 함께 붙여 ‘강허달림’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블루스 밴드 ‘풀 문(Full Moon)’에서 4년 간 활동하며 명성을 다져나갔던 강허달림은 2003년 한국 블루스 음악의 상징 신촌블루스의 보컬로 영입된다. 그의 신촌블루스 활동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신촌블루스 마지막 여성 보컬’이란 수식어를 남겼을 만큼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05년 솔로로 독립한 강허달림은 작사ㆍ작곡ㆍ편곡 및 프로듀싱까지 전담한 미니앨범 ‘독백’으로 싱어송라이터로서 출발을 알린데 이어, 2008년 첫 정규 앨범 ‘기다림, 설레임’으로 평단의 찬사까지 이끌어냈다. 2집 ‘넌 나의 바다’에서 강허달림은 1집에서 선보인 화려한 연주와 블루지한 색채를 한 꺼풀 걷어내고 그 여백을 오롯이 자신의 목소리의 잔상으로 채웠다. 2집은 순수한 목소리의 깊이를 탐구하려는 음악적 욕심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팬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성공적인 데뷔 앨범을 발표한 아티스트가 두 번째 앨범에서 오히려 음악의 힘을 빼는 선택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흔하디흔한 표현이지만 음악적으로 성숙해졌단 평가가 옳을 터이다.

강허달림은 1집과 2집을 모두 자신이 설립한 독립 레이블 ‘런뮤직’을 통해 발매했다. 강허달림은 앨범 수록곡의 작사와 작곡, 프로듀싱까지 도맡고 있다. 이 같은 철저한 홀로서기는 그의 음악적 욕심과 독립심이 컸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저도 다른 작곡가 분들의 좋은 곡들을 받고 싶어요. 주신다고는 하는데 소식들이 없네요. 그래서 직접 앨범의 모든 곡들을 만들었어요. 정말이예요.(이 부분에서 강허달림은 심각하게 말했다) 프로듀싱도 원래 제가 하려던 게 아니에요. 프로듀싱을 맡은 분이 중간에 그만두셔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맡은 것이고요. 앨범을 내주겠단 곳도 없지 않았는데, 흐지부지 되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직접 레이블을 만들었어요. 그래도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이만큼 하고 있습니다. 팬들도 스케줄 정리와 공연 기획, 홍보를 발 벗고 도와주시고 있고요. 정말 감사할 따름이죠.”

▶ “공연장에서 좋은 소식 알릴 것”= 강허달림은 오는 28일 오후 8시 서울 장충동 스테이지팩토리홀에서 ‘소리, 그녀가 되다’란 타이틀로 공연을 펼친다. 단 하루 140석 규모로 펼쳐지는 조촐한 공연이다. 강허달림은 이번 공연을 ‘초심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공연’이라고 정의했다. 이번 공연에서 강허달림은 기타리스트 전성우와, 재즈 밴드 ‘러쉬라이프’의 드러머 곽지웅과 함께 소규모 편성으로 담백한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가수라면 당연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싶고, 또 많은 앨범을 팔고 싶어 하죠.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예요. 지난 6월 수백 석 규모의 큰 무대에서 공연을 펼쳤어요. 제가 그 정도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가수란 자신감도 있었고요. 그런데 막상 무대에 서니 버겁더군요. 공연장은 커졌지만 관객과의 거리는 멀어진 느낌을 받았어요. 공연장의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란 깨달음을 얻었죠. 지난 10월 제주도 공연도 그런 생각에서 벌였던 공연이고요. 또 그동안 과분하게도 너무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이번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공연을 치러보고 싶었습니다. 홀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규모로 팬들과 밀착한 무대로 꾸며보려고요. 앞으로 팬들과 가까운 곳에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주점을 약속 장소로 잡았는데, 강허달림은 절주(節酒) 중이라며 술잔을 마다했다. 강허달림은 잔에 물을 채운 뒤 주당보다 더 주당 같은 표정으로 잔을 비우며 민망해하는 기자를 달랬다. 그는 금주(禁酒)가 아니라 절주라고 강조했다. 왜 절주를 하는가? 그 비밀은 28일 공연장에서 밝혀진다. 궁금하면 500원… 아니 공연장으로.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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