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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리치] 파친코ㆍ벤또에서 국민기업까지…일본 ㆍ아시아ㆍ유럽을 사로잡은 한국계 기업가들
뉴스종합| 2015-05-15 11:17
한창우 파친코 제조로 日 5위의 거부
마사히로 ABC마트 회장 재일교포2세
오세영 라오스서 물류·건설사업 성공
송창근 인도네시아 1위 신발 브랜드로



[헤럴드경제=슈퍼리치 섹션 홍승완ㆍ민상식 기자]한국계 기업가들이 가장 많이 활동하고 있는 지역이 일본과 동남아다. 이들은파친코와 벤또(도시락) 같은 특별한 산업에서부터 건설과 금융과 제조를 아우르는 ‘국민기업’까지 이뤄내면서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성공스토리의 이면엔 고통과 쓰라린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한국계 기업가들의 경우 기업가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많다. 침략과 징용 등 가슴아픈 역사적 배경속에 가난과 차별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다.

동남아와 호주 등에서 성공한 한국계 기업가들은 실패를 딛고 일어선 인물이 많다. IMF와 다니던 회사의 부도 등 한국에서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산업화의 경험을 현지에 이식해 성공을 거뒀다. 


▶가난과 차별을 딛고 ‘생존’…일본 속 한국 거상들=한국계 거부가 가장 많은 나라가 일본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창우 마루한 회장이다. ‘마루한’(Maruhan)은 구슬을 뜻하는 마루(丸)와 그의 성씨인 한(韓)을 조합한 이름이다. 파친코 기기를 만드는 회사다.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엔터테인먼트의 하나인 파친코 기기 제조분야에서 70%에 육박하는 시장점유율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한 회장은 현재 기준으로 일본 5위의 거부다. 그의 자산은 54억 달러로 우리 돈 6조원에 육박한다.

한 회장은 1931년 경남 삼천포(현 사천)에서 태어났다. 1947년 국내에 머물기 어려워 밀항선을 타고 일본행을 택한 후 가난과 차별을 딛고 일어나 거대 기업을 이뤄냈다. 1972년 마루한을 설립한 후 교외형 대형파친코 매장과 신형 파친코 기기 등을 선보이며 성공의 발판을 다졌다. 이후 은행ㆍ보험ㆍ건축ㆍ식품ㆍ광고ㆍ청소용역업ㆍ골프장 등에도 진출해 연간 30조원이 넘는 매출을 내는 거대 그룹으로 회사를 키워냈다. 2010년에는 장학사업을 위해 고향인 경남 사천시에 50억원 규모의 한창우ㆍ나카코교육문화재단 설립해 운영해오고 있다. 

국내에서도 알려진 신발전문 쇼핑센터 ABC마트의 창업자 미키 마사히로(三木正浩) 회장도 한국계다. 강정호(姜正浩)라는 한국이름을 지닌 그는 일본에서도 언론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때문에 그가 재일교포 2세란 사실이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요카이치(四日)시 조선학교와 아이치조선 중ㆍ고등학교 등을 다닌 까닭에 한국어도 유창하다고 알려져 있다.

원래 마사히로 회장은 의류 수입 사업에 관심이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일본 신발산업의 경쟁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을 알고 신발 산업에 뛰어든다. 그는 합리적이고 꼼꼼한 성격의 경영자라고 평가 받는다. 일손이 바쁜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직접 매장에 나와 일을 한다. ABC마트가 첫 해외투자지로 한국을 선택한 데에는 교포 기업인으로써 그의 DNA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현재 미키타니 회장의 자산은 35억달러. 포브스가 선정한 일본의 열 한번째 부호다.

일본 최대 도시락 프랜차이즈 혼케 가마도야(本家 かまどやㆍ본가 부뚜막)의 김홍주 회장도 교포기업인이다. 일본명 가네하라홍주(金原弘周)인 그는 1944년 오사카에서 출생한 교포 2세다. 제주도 출신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남매 중 상당수가 영양실조로 사망할 정도로 가난을 겪은 까닭에 먹는 장사를 시작해 ‘벤또 왕국’ 일본을 대표하는 도시락 회사를 키워냈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아버지의 고향인 서귀포 일대의 부동산을 매입하고 골프장과 리조트를 조성하는 등의 투자도 이어오고 있다.

이들 외에도 일본에서 일가를 이뤄낸 한국계 기업가들은 많다.

일본 최고 부호자리에 오른 손정의(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 외에 많은 한국계 사업가들이 일본의 각 산업에서 활약하고 있다. 일본 최대 모발클리닉 업체인 ‘리브21’의 노승정(오카무라 카즈마사) 회장은 교포 2세이고, 전동자전거로 유명한 ‘에이산’의 장영식 회장 역시 전남 순천출신의 재일교포 사업가다. 줄서서 사먹는 롤케익 ‘도지마롤’로 몇해 전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몽슈슈의 김미화ㆍ김춘화 자매 역시 일본에서 인정받고 있는 제빵인이자 기업인이다. 


▶한국형 산업화의 이식…동남아와 유럽의 한상=동남아시아 및 유럽, 호주에도 성공한 한상들이 많다. 대부분 국내 기업을 다니면서 현지 시장의 가능성을 본 뒤 창업에 나섰다. 과감하게 회사원 생활을 접고 도전했고, 실패에 굴하지 않고 성공했다.

한인 기업 중 처음으로 코스피에 상장한 코라오그룹의 오세영(52) 회장은 맨손으로 라오스 대표 기업을 만들어 ‘라오스의 정주영’으로 불린다. 그는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뒤 1987년 코오롱상사에 입사해 무역파트에서 베트남을 담당했다. 늘 자신의 사업을 계획하던 그는 1990년 중고차 수입 등을 하는 무역업체를 창업했다. 그러나 1995년 아세안에 가입한 베트남 정부의 중고품 수입중단 조치로 파산했다.

무일푼이 된 그는 인도차이나반도 여행길에 올랐다가 라오스 수도 비엔티엔의 중고차 시장에서 가능성을 보고, 누나에게 빌린 2000만원으로 중고차 유통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1997년 코라오디벨로핑이 탄생했다. 코라오(Kolao)는 코리아(Korea)와 라오스(Laos)를 합친 말이다. 코라오는 라오스에서 현재 물류ㆍ건설ㆍ금융 사업에 진출해 있다. 코라오의 연매출은 4억달러 정도이며, 오 회장의 자산은 상장주식 기준 4637억원으로 한국 주식부호 50위에 올라 있다.

인도네시아의 송창근(55) KMK글로벌스포츠그룹(이하 KMK) 회장과 말레이시아의 권병하(64) 헤니권 코퍼레이션(Henikwon Corporationㆍ이하 헤니권) 회장도 사업에 크게 실패한 뒤 재기에 성공한 경우다. 송 회장은 대학 졸업 후 1984년 나이키 신발을 제조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바로 한국의 신발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1988년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전 재산을 털어 신발 관련 사업에 투자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단돈 300달러로 신발 부자재 영업을 시작했다. 1990년에 인도네시아 현지 신발 공장을 인수했고, 1993년부터는 나이키 생산도 시작했다. KMK는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2만여명의 종업원이 연간 3000만켤레의 신발을 생산해 나이키, 컨버스 등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상품으로 납품하고 있다.

또 자체 브랜드인 ‘이글(Eagle)’의 연간 판매량은 약 300만켤레로 인도네시아 내 1위 신발 브랜드다. KMK의 연매출은 2억5000만달러에 이른다.

말레이시아의 한인 사업가인 권 회장은 대학 졸업 후 국제그룹에 입사해 평범한 회사원의 삶을 살다 입사 5년 만에 사표를 냈다. 해외에서 기계부품을 들여오는 사업을 하다 실패한 뒤 1982년 말레이시아로 건너갔다. 이듬해 헤니권을 창업해 중전기 동력전달장치(부스덕트) 분야에 뛰어들었다. 헤니권은 창업 당시 파트너였던 중국인 헨리(Henry)와 말레이시아인 닉(Nick), 권 회장의 이름을 조합한 것이다.

현재 헤니권은 현지 공장에서 생산된 부스덕트를 세계 40여개국에 수출, 연매출 1억5000만달러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쌓은 부는 장학재단 등을 설립해 현지에 환원하고 있다. 이 같은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영국의 백작에 해당하는 명예직인 ‘다토’(Dato) 작위를 말레이시아 국왕으로부터 받았다.

김우재(72) 무궁화그룹 회장도 첫 사업에서 쓴맛을 봤다. 대한항공에 입사해 10년간 근무하다 1977년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원목개발 사업을 했다가 빚만 남기고 실패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첫 실패에 낙심하지 않고 한인 사회를 상대로 한 김치 제조 납품을 시작으로 1981년 식품업에 진출했다. 그는 이를 발판 삼아 건설업과 관광업, 부동산관리업도 시작해 현지 진출 35년 만에 연매출 1억달러 규모의 무궁화그룹을 일궈냈다.

국내 대기업에서 오랜 기간 일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킨 경우도 있다. 싱가포르의 세계적인 자동차부품 기업인 PG홀딩스의 박기출(59) 회장은 40대에 대기업에서 나와 창업을 했고, 10년여 만에 직원 1500명, 연매출 1억달러 규모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쌍용건설의 싱가포르 지사 주재원이었던 박 회장은 1997년 외환위기로 회사가 인원을 줄이자 스스로 회사를 나왔다. 이어 세계적인 건축 외장재 업체인 퍼마스틸리사에서 근무하다 2001년 PG홀딩스를 설립하고 말레이시아에 자동차 부품 생산공장을 차렸다. PG홀딩스그룹은 현재 말레이시아와 러시아에서 자동차 내장재 제조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박종범(58) 영산그룹 회장은 1999년 외환위기 당시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직접 창업해 연매출 10억달러대의 영산그룹을 일궜다. 영산그룹은 주로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무역업과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박 회장은 기아자동차 오스트리아법인장으로 재직하다 1999년 오스트리아에서 ‘영산한델스’(영산무역)를 설립했다. 전남 영산강 인근에서 태어난 것을 잊지 못해 회사 이름을 ‘영산’으로 정했다. 한국에서 사탕 포장지용 필름을 수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동차 부품과 타이어, 배터리 및 케이스, 휠 등으로 점차 사업을 확대했다. 2007년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차량 부품조립 공장을 지었다. 특히 박 회장의 두 아들은 오스트리아 영주권을 갖고 있지만 모두 한국군에 자원 입대해 군복무를 마쳤다.

호주의 재외동포 대북 사업가로 알려진 천용수(62) 코스트(KOAST)그룹 회장은 4년간 한독제약 영업부에서 일하다 1983년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이어 항구에 입항하는 화물선에 각종 물품을 납품하는 ‘선식’(船食)업체 ‘아시안십서플라이’(ASIAN SHIP SUPPLY)를 1988년 창업해 큰돈을 벌었다. 선식사업의 치열한 입찰경쟁에서 천 회장은 한국의 제약 영업에서 배운 세일즈기법을 활용해 효과를 봤다.

1992년에는 북한의 광산 개발에 주목해 동포 사업가 중에서 처음으로 북한에 진출해 ‘코스트 평양사무소’를 열었다. 이후 북한 내 광산 개발 외 비누제조업, 가발산업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코스트그룹의 연매출액은 2억달러 규모다.

sw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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