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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우를 다시 만나다]우리시대 ‘불후의 화백’…그가 페북으로 돌아오다
뉴스종합| 2015-07-09 13:31
[헤럴드경제=장연주 기자]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았던 1960~70년대 소시지는 도시락 반찬으로 최고 인기였다. ‘분홍 소시지’는 아무나 싸오기 어려운 비싼 반찬이었고,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추억의 반찬’의 대명사로 통했다.

요즘 40대 이상이 ‘분홍 소시지’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만화는 바로 진주햄의 광고만화 ‘진주군과 마미양’이다. 고(故) 신동우 화백은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 만화를 통해 소시지에 관한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담아냈다. 또 젊은 세대들에게는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진주햄 ‘천하장사 소시지’ 포장 그림의 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신동우 화백의 생전 모습

‘한국 만화사의 거장’으로 꼽히는 고 신동우 화백. 지난 1994년 58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한 그가 페이스북에서 되살아났다. 신 화백의 아들 신찬섭(49) 제일기획 캠페인팀장이 부친의 20주기를 기념해 지난해 12월15일 신 화백의 페이스북 페이지(https://www.facebook.com/chadolbawee)를 열고 그를 기억하는 세상 사람들과 소통을 시작한 것이다. 신 팀장은 페북을 통해 단순히 ‘사부곡(思父曲)’만 담는 게 아니라, 이 시대의 소통과 낭만을 빼곡히 소개하고 있다. 작은 금액이지만 페북을 통한 기부나눔도 인상적이다. 페북을 통해 부활한 신 화백. 우리 시대 최고의 낭만가이자 사람 냄새를 표방했던 신 화백. 그의 인생을 한번 돌아보면서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뭔지 물음표를 던지는, 진짜 사람다움이 뭔지 생각해보는 애틋한 시간여행에 빠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신동우 화백이 한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음악을 듣고 즉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

▶돈벌이로 시작한 만화…‘거장의 탄생’

신 화백은 1936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당시인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땃돌이의 모험’이라는 창작만화를 발표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는 ‘그림 신동’으로 불렸다. 부산 피난시절 아이들이 뛰어놀 공간은 마땅치 않았다. 좁은 골목에 따닥따닥 붙어 있는 만화방에 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새로운 만화에 대한 수요는 많았지만, 만화가는 많지 않았던 시절이다.
신동우 화백이 1979년 서울 서소문에 위치한 자신의 화실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모습

어릴 때부터 그림재주가 많았던 그는 피난시절 돈벌이를 위해 만화를 시작했다. 직접 그린 만화책을 여러권 만들어 팔았고, 꽤 좋은 수입을 올렸다. 한 출판사 사장은 그의 만화를 보고 직접 만화책을 내기도 했다. 서울대(응용미술학과) 진학 후에도 학보에 만화를 연재해 학비를 벌었다.

1965년부터 소년조선일보에 연재된 ‘풍운아 홍길동’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1200여회에 걸쳐 연재된 최장수 신문연재 아동만화로, 당시 아이들에게 홍길동은 최고의 슈퍼영웅으로 통했다. 1968년에는 고인의 친형인 신동헌 감독이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3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홍길동’은 한국 최초의 장편 만화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장편만화 ‘검호 날쌘돌이’를 비롯해 ‘지구함대’, ‘우주소년’ 같은 SF만화와 ‘해군 거북선이’, ‘빵점이’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빠른 속도로 선보였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밝고 정감있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해줬다고 사람들은 회고한다. 친근한 캐릭터를 잘 그렸던 그의 작품이나 캐릭터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광고에도 자주 쓰였다. 1970년대 유행한 ‘아들딸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같은 포스터와 반공 포스터, 정부 간행물 제작에도 상당 부분 참여했다.

▶“성인만화는 않겠다”…20년 만에 만화 접은 사연

신 화백은 그림 그리는 속도가 엄청 빠른 것으로 유명했다. 머리가 비상해 어떤 상황에서도 순식간에 그림을 그려 내는 재주가 남달랐다. 당시에는 미대를 나오면 직업화가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학벌이 좋은 만화가는 전무했다. 미대에서 정식 미술수업을 받다보니 레이아웃을 할때 만화에도 원근이 중요한데, 그걸 참 잘했다고 전해진다.

신 화백의 순발력에 대해 아들은 이렇게 회고한다. “한번은 저녁 초대를 받고 제주도의 지인 집에 갔는데, 그 집 아이들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어요. 붓이 없자 커피를 갖고 농도를 달리해서 즉석에서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주신 생각이 납니다.”

그는 방송출연을 자주 한 만화가로도 유명하다. 만화가로 데뷔한 형 신동헌이 자신에게 들어온 방송출연 제의를 고사하고 동생을 추천하면서 방송에 발을 디뎠다. 음악을 들으면서 곧바로 그림을 그리는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순식간에 ‘뚝딱’하고 그림을 그려내 인기가 좋았다. ‘우리들 세계’를 비롯해 다수의 오락 및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작고하기 바로 전 주였던 1994년 11월까지 방송에 출연했을 정도다.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수없이 그렸던 그는 만화를 시작한지 약 20년 만인 1970년대 중반, 돌연 만화를 중단했다.

“내 아이를 기르면서 성인만화를 하지 않겠다”는 소신때문이었다. 당시는 만화계의 조류가 아동만화에서 성인만화로 바뀌는 시점이었다. 동심을 중시하고 아이들을 사랑했던 신 화백 다운 결정이었다.

▶‘차돌바위’ 페이스북…‘소통과 기부의 장(場)’으로

신 화백의 페이스북 주소는 ‘차돌바위(chadolbawee)’다. 차돌바위는 ‘풍운아 홍길동’에 등장하는 주인공 홍길동의 오른팔 격인 인물로, 감초 역할을 맡고 있다.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차돌바위는 신 화백이 특히 좋아했던 캐릭터로,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세워진 그의 비석에는 차돌바위 캐릭터가 새겨져 있다.

그의 페이스북을 찾은 사람들은 그의 홍길동 캐릭터에 대해 “한국적이고, 많이 귀엽고 예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진주햄 소시지 관련해서는 “그 소시지를 먹으면 달리기를 잘할 줄 알았다”, “당시 정말 고급 반찬이었는데, 그 시절 생각난다”며 과거를 회고한다. 
신동우 화백이 1980년 설악산으로 국내 스케치 여행을 하면서 찍은 모습

신 화백의 아들인 신 팀장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20년이나 지나다 보니 돌아가신 걸 잊으신 분들이 꽤 많다”며 “페이스북을 통해 건강하게 작품활동을 해달라는 분들이 아주 많다”고 했다.

신 화백의 페이스북에는 그가 생전에 그렸던 작품과 사진들이 올라와 있다. 미스터피자의 정우현 MPK그룹 회장과 절친했던 그는 미스터피자의 로고나 판촉물 작업에도 많이 참여했다. 올해 창립 25주년을 맞은 미스터피자가 창업 당시 심볼마크 피자박스 디자인을 최근 다시 선보였는데, ‘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공중에 밀가루 반죽을 던지는 모양의 캐릭터’는 그의 작품이다. 또 1980년대에는 용평리조트 심볼을 직접 그려넣기도 했다. 신 화백은 50대가 넘어서야 스키를 배웠는데, 배우자마자 스키의 매력이 흠뻑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남겨진 그의 작품은 많지 않다. 만화 원고는 몇 백권이 있지만, 만화 작품은 액자로 7~8점, 도자기는 7~8점 뿐이다. 이 때문에 신 팀장이 페이스북에 부친의 작품을 올리면, 신 화백의 더 좋은 작품을 보유한 사람들이 작품을 올려 서로 공유하고 있다.

신 화백의 페이스북은 오픈한지 6개월여 만에 ‘좋아요’ 수가 약 1만7300개로 늘었다. 지난해 646명에 이어 올 1월엔 1941명, 2월부터는 매달 600~800개 가량의 ‘좋아요’ 수가 쌓이고 있다.

신 팀장은 ‘좋아요’를 누른 수에 0을 하나 더 붙여 기부에 나서고 있다. 올 1분기에는 8만8000원을 유니세프에 기증했고, 2분기에는 6만3000원을 굿네이버스에 기증했다. 크지 않은 금액이지만, 앞으로도 페이스북 ‘좋아요’ 수에 따라 굿네이버스의 국내 청소년 지원 프로그램에 계속 기부를 할 생각이다. 이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만화를 그린 아버지의 뜻에 맞게 아이들을 위해 작지만 보탬이 되고자 하는 바람에서다. 
신동우 화백이 서소문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

신 팀장은 “기회가 된다면 상설전시관을 만들어 아버님이 남긴 그림들이 재탄생할 수 있는 방법도 고민중”이라며 “이 시대의 젊은 세대들에게 한국에 훌륭한 만화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페이스북을 통해 젊은 세대들과 오랫동안 소통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yeonjoo7@heraldcorp.com

<故 신동우 화백이 걸어온 길>

▶1936년 함경북도 회령 출생

▶1953년 ‘땃돌이의 모험’으로 데뷔

▶1955년 서울 용산고등학교 졸업

▶1955년 ‘우주 유격대’ 연합신문에 연재

▶1959년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졸업

▶1959년 ‘허진형제복수록’ 발표

▶1963년 ‘공부 못하는 빵점이’, ‘아리랑’, ‘심술100단’등 발표

▶1965년 ‘풍운아 홍길동’ 소년조선일보에 연재(최장수 신문연재 아동만화)

▶1967년 ‘번개검사 호피’, ‘벼락검법’ 등 발표

▶1968년 한국 최초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 제작 참여

▶1970년 일본 아사히신문 ‘세계인기만화 10선’ 선정

▶1980년 ‘한국의 역사’로 한국만화가상 본상 수상

▶1991년 색동회상 수상

▶1994년 향년 58세로 별세

▶2007년 SICAF(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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