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경제
[명절이 외로운 사람들, 한끼식품] 쓸쓸한 나홀로族 많을수록 진화하는 도시락
뉴스종합| 2015-09-28 09:00
[헤럴드경제=박일한 기자] 특별한 뉴스가 보이지 않는 추석연휴에 유달리 자주 눈에 띄는 기사가 ‘도시락 전달 행사’다. 대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 등이 지역의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가정 등을 방문해 도시락을 전달하는 행사를 열었다는 소식이다. 전달하는 도시락은 ‘사랑의 도시락’, ‘엄마 도시락’ 등으로 불린다. 연휴 외롭고 쓸쓸한 이들을 위로해주는 한 끼의 식사다.

도시락 이름에 ‘엄마’, ‘사랑’이 붙는 건 역설적이다. 도시락은 외로운 사람들이 더 많이 찾기 때문이다. 여럿이 모이면 굳이 도시락을 먹을 필요가 없다. 여럿이서도 도시락을 먹는다면 백발백중 빨리 한 끼를 때우고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다. 

현대인의 외로움을 상징하는 여러가지 종류의 도시락.

도시락은 쓸쓸한 사람이 많을수록 잘나가는 대표 상품이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홀로 식사하기 도시락만큼 간편한 게 없다. 작은 돈으로 그럭저럭 한 끼를 해결하기 좋으니 1인가구가 가장 많이 찾는다.

물론 도시락의 출발은 외로움과는 관계가 없다. 1990년대 이후 학교급식이 일반화되기 전 학창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도시락은 추억의 대상이다.

김칫국물이 도시락 밖으로 흘러 교과서가 벌겋게 물들어 본 경험, 계란이나 소시지 반찬을 싸온 친구를 부러워했던 기억을 대다수 40대 이상 중년은 공유하고 있다. 요즘 실내 포장마차나 주점에서 양은도시락통에 김치, 소시지, 계란프라이가 들어가는 ‘추억의 도시락’이 인기를 끄는 건 이런 배경이다.

외식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엔 집에서 싸준 도시락을 먹는 회사원도 흔했다. 신혼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매개체도 도시락이었다. 1990년 개봉한 영화 ‘나의사랑나의신부’에는 신부 미영이 출근하는 영민을 위해 도시락 밥 위에 콩으로 ‘아이 러브 유(I Love You)’라고 마음을 표현한다.

도시락이 ‘외로움’과 본격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한 건 대략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다. 경기 침체가 심화하고 구조조정이 일상화하면서 서민 생활은 점점 더 불안해진다. 계약직 고용이 늘어나고 소위 ‘88만원세대’(계약직의 세후 평균 임금이 88만원이라는 의미에서)가 탄생하면서 도시락은 점심값을 줄이려는 직장인이나 아르바이트 대학생이 가장 쉽게 찾는 한 끼가 된다.

도시락은 이제 학교급식 이전 교실에서 친구들과 추억을 만들고, 젊은 부부가 사랑을 확인하던 매개체에서 싸고 편하게 어떻게든 한끼를 때우는 가난하고 외로운 젊은이의 끼니꺼리로 탈바꿈한다.

어느새 편의점 도시락을 애용한다는 의미의 ‘편도족(편의점 도시락족)’이란 신조어가 나온다. 결혼을 미루고 혼자 생활하면서 혼자 밥을 먹는 ‘혼밥족’도 탄생했다. 1인가구 급증이라는 인구통계학적 변화 속에서 도시락 시장은 급성장 시대를 맞이했다.

이는 통계에 그대로 드러난다. 편의점 3사(CUㆍGS25ㆍ세븐일레븐)의 도시락 매출은 2010년대 들어 매년 40~50%씩 성장했다. 1993년 도시락 시장에 진출했던 한솥을 제외하고, 본도시락, 오봉도시락 등 대부분 도시락 프랜차이즈가 창업한 시기는 모두 2010년이다. 도시락 산업은 어느새 한해 2조5000억원 규모로 커졌다.

도시락 산업은 점점 더 그 외형을 넓히고 있다. 도시락은 ‘집밖에서’ 먹는 ‘점심용’이라는 상식도 깨졌다.

요즘엔 젊은층이나 주머니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직장인들은 도시락을 사와 집에서 먹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 됐다. 지난해 저녁시간대 도시락 판매비중은 26.3%로 처음으로 점심시간대를 추월했다.

종류와 수량도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편의점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 3000원 정도면 고기며 햄까지 곁들인 괜찮은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 CU에서 판매하는 최저가 도시락인 ‘소불고기미트볼정식’이 대표적이다. 3000원이면 소불고기와 미트볼, 볶음 김치와 무말랭이 무침을 반찬으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

반찬수도 많아졌다. 최근 세븐일레븐은 업계 최초로 11찬 도시락을 내놓았다. 중량이 500g에 달하는 ‘혜리11찬도시락’(4500원)이다. 세븐일레븐은 7명의 ‘밥소믈리에’ 영입을 통해 이 도시락을 개발했다. 밥소믈리에는 일본취반협회가 주관하는 인증제도로 쌀과 밥에 관한 최고 권위 자격증으로 통한다.

도시락 문화가 발달된 일본식 음식을 중심으로 한 고급 도시락 시장도 성장하고 있다. 


현대인의 외로움을 상징하는 여러가지 종류의 도시락.

특히 특급호텔의 도시락의 가격은 10만원을 넘는 것도 있다.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용도가 아니라 육류와 생선, 야채 등 좋은 재료를 사용한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다. 서울신라호텔의 아리아께에서 파는 10만원짜리 도시락에는 밥과 장국, 도미조림, 소고기 아스파라거스말이, 새우튀김, 메로구이, 밤조립, 멍게 젓갈 등을 밑반찬으로 생선회, 성게알, 전복까지 들어간다.

도시락 산업이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일본 뿐 아니라 미국ㆍ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소비하는 제품 유형은 달라도 점심을 가볍게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도시락 시장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특임교수는 “저성장 경기흐름, 1~2인 가구 증가, 높은 청년 실업률 등의 상황에서 외로운 싱글족을 위한 다양한 산업이 발전할 수밖에 없다”며 “일본 사례처럼 도시락시장도 나홀로족의 증가와 함께 꾸준히 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jumpcut@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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