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공연 리뷰] 헌신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어리석은 사랑
라이프| 2016-02-04 08:45
-연극 ‘렛미인’ 2월 28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연극 ‘렛미인’은 사랑 이야기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는 헌신적인 사랑과, 그 헌신과 희생을 취하는 이기적인 사랑, 그리고 기꺼이 희생을 감당하려는 어리석은 사랑.

억만년이 지나도 똑같이 되풀이되는 이 ‘죽일 놈’의 사랑 이야기를 위해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 ‘뱀파이어’를 내세웠다.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를 사랑한 하칸은 그녀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그녀에게 피를 가져다 주며 한평생 헌신한다. 

정글짐에서 오스카(왼쪽)와 일라이. [사진제공=신시컴퍼니]

그러나 영원히 늙지 않는 뱀파이어 소녀는 늙고 죽어가는 남자 하칸 대신 또 다른 사랑을 택한다. 하칸처럼 자신의 곁에서 헌신할, 아직은 젊고 파릇파릇한 남자. 그 어리석은 사랑의 주인공은 ‘돼지’라고 놀림 받으며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10대 소년 오스카다.

‘렛미인’은 진부한 뱀파이어 이야기면서 동시에 더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그 사랑 이야기를 풀어가는 표현 방식은 대단히 스타일리시하다.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하얀 눈밭, 그 위를 물들이는 선연한 핏빛과 푸르스름한 조명은 물론, 현대무용을 접목한 배우들의 몸 연기, ‘무브먼트’는 이 연극이 얼마나 ‘비주얼’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뱀파이어 캐릭터에 맞게 일라이 역을 맡은 배우는 매 순간 무용을 하듯 몸을 쓴다. 특히 정글짐을 타거나 정글짐에서 떨어질 때, 나무를 기어오를 때 민첩한 무브먼트는 와이어를 쓰지 않고도 마치 날아다니는 것 같은 뱀파이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라이(왼쪽)와 하칸. [사진제공=신시컴퍼니]

오스카가 칼로 나무를 찌르는 장면에선 솔로가 군무로 확장되며 한 편의 무용극을 연출한다. 여기에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때로 스산한 포스트록 스타일의 음악이 덧입혀져 관객으로 하여금 시리도록 아름다운, 뻔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랑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연극 ‘렛미인’은 오리지널 무대를 그대로 재현한 ‘레플리카(Replica)’ 공연이다. 뮤지컬 ‘원스’를 만든 존 티파니(연출)와 스티븐 호겟(안무)의 합작품으로, 2013년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에서 제작, 초연됐다. 원작은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동명 소설로, 2008년 스웨덴에서 영화로 제작, 2010년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된 바 있다.

한국 배우들의 연기는 발군이다. 이 작품을 한국에 들여 온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 프로듀서가 “신예와 중견배우를 막론하고 연기 뿐 아니라 몸도 잘 쓰는 배우들을 발굴해 스타로 키워나가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라이 역에 캐스팅 된 배우 박소담은 전작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귀신 들린 소녀 역을 맡았었다. ‘충무로 괴물 신인’의 연극 데뷔로 화제를 모은 박소담은 ‘저래도 멘탈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피칠갑을 한 채 잔혹무도한 뱀파이어 소녀를 연기한다.

오스카 역할을 맡은 신예 배우들의 풋풋한 연기와 탄력 넘치는 무브먼트도 매력적이지만, 2막 수영장 장면에서는 ‘기예’에 가까운 잠수 연기로 객석의 놀라움을 자아낸다. 이 장면을 위해 따로 스쿠버 다이빙을 배웠을 정도라고.

처연하고 슬픈 사랑의 주인공인 늙은 하칸의 역에 연극, 영화, 드라마를 넘나드는 관록의 배우 주진모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출연 박소담/이은지(일라이), 안승균/오승훈(오스카), 주진모(하칸) 등. 2월 28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amigo@heraldcorp.com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