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바뀌는 ‘단식(斷食)의 정치학’…광장→둥지, 투쟁→정쟁, 야당만→여당도
뉴스종합| 2016-09-27 09:34
[헤럴드경제=이슬기 기자] 단식은 사회적 약자의 전유물이었다. 자신의 의지가 관철될 때까지 ‘생존의 본능’을 끊고 서서히 죽어가겠다는 무언의 압박은, 소통 창구를 차단한 채 뒤돌아 앉은 권력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곡기를 끊어 마른 몸은 권력의 막강함과 대비되며 곧 대중의 지지를 이끌었고, 괄목할 만한 정치적 성과도 수차례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런 ‘단식의 패러다임’에도 변화가 생기는 모양새다. 지난 26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면서부터다. 청와대와 직접 소통하는 집권 여당 대표의 단식은 생소하다.

지난 2003년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대표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비리에 대한 특별검사 도입을 촉구하며 17일간 단식한 적이 있지만, 보수세력이 야당으로 전락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결국, 이 대표의 단식은 행정권력은 가졌되, 의회권력은 빼앗긴 새누리당의 ‘딜레마’를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게 정치권의 해석이다.

▶공개형→은밀형, 단식이 집권 여당 ‘몰락’ 징표로 비쳐선 안 돼=27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 대표 단식의 함의는 그 형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지난 2014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를 비롯한 야당 의원들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26일간 단식 투쟁을 벌일 때도, 지난 2007년 문성현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와 천정배 열린우리당 의원이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며 단식할 때도 장소는 ‘광장’이었다. ‘생존의 거부’는 더 많은 사람의 눈에 띌 때 힘을 발휘한다는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이 대표는 전날 단식 투쟁 선언 직후 농성장소를 국회 본청 로비(로텐더홀)에서 자신의 사무실로 바꿨다. ‘반드시 의지를 관철하되 집권 여당 대표로서의 품위는 지키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강석호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체면이 있는데 일반인처럼 길거리에서 단식하기는 좀 그렇다”고 했고, 서청원 새누리당 전 대표는 “(국회를 찾는) 외부 손님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정 의장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면서도, 이 대표의 단식이 집권 여당 ‘몰락’의 징표처럼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새누리당 당대표실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의 의장직 사퇴를 촉구하는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거시형→미시형, 민주ㆍ자유투쟁에서 대야(對野) 기선제압으로=단식 의제의 범위가 전보다 다소 좁아진 것도 특징이다. 지난 1983년 5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정권 아래서 정치활동 규제 해제, 대통령 직선제 등을 내걸고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는 민주화 투쟁의 기폭제가 돼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이뤄내는 계기로 작용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0년 10월 지방자치제 도입 및 내각제 포기를 요구하며 13일간 단식을 감행, 현재 지방자치제의 토대를 정립했다. 단식은 주요 정치사를 이끌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단식 의제는 미시화ㆍ개별화하는 추세다. 2003년 임종석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반대해 13일간 진행한 단식, 2005년 강기갑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하 쌀 협상에 반대해 20일간 진행한 단식이 대표적인 예다. 이 외에도 2010년 양승조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은 세종시 수정안 추진에 반대해 22일간 단식투쟁했다.

이 대표 역시 ‘의회 민주주의 복원’을 단식의 표면적 이유로 내걸었지만,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둘러싼 여야의 기 싸움이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 차기 대선 판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정치권에서는 힘을 얻는다. 정 의장의 사퇴 혹은 사과가 정부와 소여(小與)의 위상 회복에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대표는 이날 아침 농성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다수당이 1년 남은 대통령의 임기 동안 이렇게 계속 흔들고, 무릎 꿇리겠다는 것 아니냐”고 했다.

▶“단식 성급했던 것 아니냐”…‘무위론’ 지적도=한편, 이 대표가 경색 정국 초기부터 무기한 단식농성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선택하면서 사실상 여야의 출구를 봉쇄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 대표의 단식은 ‘여당의 전략적 실수이자 협치의 실종’이라는 것이다. 실제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오전 기자들과 만나 “단식은 성공한 적이 없다. 이 대표가 불안한 정국에 휘발유를 퍼 넣었다”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갈 수는 없다. 마주 보고 기차가 달리면 충돌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정치권 일각에서는 현재 예정된 국정감사를 이틀 가량 연기한 뒤, 정 의장이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사과하는 선에서 냉각 정국이 해소되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나온다. 박 비대위원장은 “갈등의 해법을 고심하고 있다”며 “우상호 더민주 원내대표에게도 유연한 자세를 촉구해 화답을 받았다”고 했다. 다만, 당사자인 새누리당과 더민주 지도부는 여전히 날선 공방전을 이어갔다.

우 원내대표는 “여야의 극한 대치가 벌어지면 당 대표들이 나서 교착 상태 풀었던 전례가 있다”며 “그런데 집권 여당 대표가 단식에 나서는 바람에 대화 채널이 다 끊겼다”고 비판했고, 조원진 새누리당 정세균 사퇴 관철 비대위원장은 “뒷골목 청부업자들이나 할 만한 ‘맨입’ 발언이 국회의장에게서 나온 데 환멸을 느낀다. 정 의장이 사퇴할 때까지 의사일정을 거부한다”고 했다.

yesye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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