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출판은 인생 최상결정” 출판거목 박맹호 별세
라이프| 2017-01-22 11:55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출판은 인생에서 최상의 결정이었다”

‘출판계 거목’‘우리 지식산업의 거인’ 박맹호 민음사 회장이 22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4세.

우리 출판문화사를 맨 앞에서 써온 고인은 50년 남짓 수많은 책 출간을 통해 책의 형식과 질에서 끊임없는 혁신을 해온 진정한 출판인이었다.

고인은 1933년 12월31일 충북 보은 장신2리에서 태어났다. 비룡소로 불리는 곳이다. 이 명칭은 현재 민음사의 아동 청소년 전문 책 브랜드로 쓰이고 있다. 경복중ㆍ 청주고등학교를 거쳐 1952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한 고인은 문학청년으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다. 서울대 재학2학년때 ‘현대공론’창간 기념 문예공모에 박성흠이란 필명으로 응모 ,단편 ’해바라기의 습성‘이 당선됐다.

학교 ’대학신문‘문예 공모에선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의 작가 주요섭이 공모선후 소감에서 “낙선시키기에는 아까운 작품”으로 고인의 ‘희생’을 거론한 일화도 있다. 1955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자유 풍속’을 응모했으나 자유당 정부를 신랄하게 풍자한 게 문제가 돼 탈락했다. 이는 심사를 맡았던 문학평론가 백철이 “박맹호의 ‘자유풍속’은 지금까지 우리 문단에서 그 예가 없는 장관을 창조한 작품으로 나는 이 응모작을 일석으로 하고 오상원의 ‘유예를’ 이석으로 정했는데 결국 ‘유예’가 입선되었다”고 밝힌 기록에서 확인된다.

고인이 출판의 길에 들어선 건 1966년 5월. 남의 사무실을 빌려 첫 출간한 책은 일본어판을 번역한 ‘요가’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당시 1만5000권이 팔리면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두 번째 책인 유주현의 ‘장미부인’과 잇달아 낸 책들은 고배를 마셨다. 3000만원의 빚이 남았다. 빚에 허덕대고 있던 때, 주위의 권유로 일본 책 리프린트 ‘건축설계 자료 집성’을 낸게 성공하면서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문학 출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첫 기획은 ‘문학적 사건’으로 평가받는 바로 ‘세계시인선’. 당시 일본판의 중역에서 벗어나 원문과 번역을 동시에 싣는, 국내 제대로 된 첫 번역시집이었다.

이에 고무돼 1974년에 나온 ‘오늘의 시인 총서’ 역시 돌풍을 일으켰다. 시인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는 3년 동안 3만부가 팔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자비 출판이 대부분이었던 시집도 처음으로 기획 출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1976년 계간 문예지 ‘세계의 문학’을 발간, ‘오늘의 작가상’을 만든 것은 또 한번 출판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 제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한수산의 ‘부초’,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등이 이를 통해 배출됐다.

출판계가 좌우 진영으로 갈리게 된 1980년대 상황에서도 그는 어느 쪽에도 쏠리지 않으면서 양쪽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가 ‘혈연같은 우정’을 이어왔다고 한 고은 시인, 소설가 황석영 등은 물론 이문열과도 각별한 인연을 이어왔다.

고인은 그의 자서전에서 “나는 출판을 해오는 내내 보수와 진보 사이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철저하게 중도를 지켜온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 역시 엄혹한 군부시절 빨갱이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1985년 수요회를 조직, ‘출판인 17인 선언’으로 당국에 밉보이며 그는 1989년 노태우 정부 시절 빨갱이로 낙인찍혀 특별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 추징세액은 1억원. 매출이 5억원인 때였다.

고인은 늘 ‘좋은 책’에 대한 갈증과 애정으로 책 디자인에서도 우리 출판의 역사를 새롭게 써왔다. 특히 ‘오늘의 시인 총서’는 ‘30절 판형, 가로쓰기’의 산뜻한 장정으로 디자인 혁신을 일으켰다. 전문 북 디자이너를 통한 민음사의 책 디자인은 여타 출판사들의 롤모델이었다.

고인은 2006년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으로 선출돼 출판계 현안과 출판문화를 바꾸는데도 앞장서왔다. 당시 일을 함께해온 한 출판인은 “회장이었던 그 분은 먼저 말씀하시기 보다 이야기를 신중하게 경청하시는 분, 이상적인걸 놓치지 않으면서 현실주의자였던 분, 부드러워 보이지만 결단이 단호하고 빨랐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위은숙씨와 상희(비룡소 대표이사), 근섭(민음사 대표이사), 상준(사이언스북스 대표이사)가 있다.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 24일 오전 6시.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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