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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딜레마 ②]갈라진 광장, 태극기는 슬프다
뉴스종합| 2017-03-02 10:00
- 친박 단체, 태극기를 우파 상징처럼 독점
- 반작용으로 일반 시민이 꺼리는 현상 우려
- “배제와 반복 아닌 화합과 조화의 상징 돼야”


[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98년 전, 전국 방방곡곡은 태극기의 물결로 넘쳤다. 유관순 열사로 대표되는 이 땅의 민초들을 하나로 뭉쳐 일본 제국주의와 그에 부역한 친일파에 맞서게 한 힘은, 태극기가 다시 이땅에 휘날릴 때 행복한 삶을 되찾을 거란 믿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태극기의 물결이 광장을 뒤덮었지만 98년 전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태극기는 화합과 치유 대신 분열과 반목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3ㆍ1절인 1일, 서울 도심 한복판인 세종대로 사거리는 태극기의 물결로 넘실댔다. 이날 보수단체의 태극기 집회의 사전행사 성격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과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이 주최한 ‘3ㆍ1만세운동 구국기도회’에는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에 이스라엘 국기까지 등장했다. 

[사진설명=화합과 조화의 상징이 탄핵 정국의 이념갈등에 휘말려 배제의 상징이 됐다. 친박단체들은 자신들에게만 태극기를 들 권리가 있다며 상대를 ‘국민이 아닌 자’로 규정했다. 그 반작용으로 대다수 시민들 사이에는 “태극기를 보기도 싫다”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지난 1일 3ㆍ1절 주말 집회에 태극기를 들고 나온 양측 집회 참가자들. 이원율 기자 / yul@heraldcorp.com]

이날 구국기도회의 테마는 ‘사회통합’이었지만 실제 터져나오는 목소리는 촛불 민심에 대한 ‘증오’와 ‘배제’였다. 이영훈 한기총 대표회장은 “온갖 거짓이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다. 거짓말로 SNS를 뒤덮고 사람들을 파괴하고, 헛된 소리를 해서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며 탄핵 정국을 비난했다. 전국 목사 500명으로 구성됐다는 ‘구국결사대’가 단상에 올라 “태극기를 싫어하고 대통령을 모함하는 자들, 정권을 찬탈하고 공산화하기 위해 발악하는 자들을 모조리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날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친박단체 회원들은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태극기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노란 리본을 단 태극기를 들고 나오기로 했다는 소식에 격분했다. 서울 관악구에 거주한다는 이병필(55) 씨는 “국가 정통성 부정하는 세력이 어떻게 태극기를 드느냐. 그것은 모순”이라며 "피흘려 자유, 민주, 법치를 세워놨는데 좌익 공산이념 세력에게 맡길 수 없다”며 촛불 집회 참가자를 종북세력으로 몰았다. 김모(62) 씨 역시 “이쪽 생각이 있고 저쪽 생각이 있는데 같이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건 예의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는 한술 더떠 노란리본을 단 태극기를 ‘내란’의 상징으로 몰았다. 변 대표는 “그들이 이제는 태극기에 노란 리본을 구겨 넣겠다는데 그게 진짜 태극기가 맞느냐 ”며 “국기에다 이상한 문양을 그려넣고 다니면 반란 세력으로 다 체포해야 한다”고 외쳤다. 태극기를 단일 이념으로 독점하겠다는 얘기다.

친박 단체가 태극기를 드느냐 마냐를 자신의 편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자, 태극기는 일본 에도 막부 시절 기독교도를 색출해 내기 위해 밟고 넘어가게 길에 놓아둔 예수님의 동판 조각이 됐다. 촛불집회에 4번째 참여했다는 안도영(45) 씨는 “시청역에서 광화문광장으로 가려면 태극기 집회를 뚫고가야 하는데 언제 시비를 걸지 몰라 말조심하며 지나갈 수 밖에 없다”고 개탄했다.

태극기를 친박세력이 독점하자 촛불집회 진영에서도 태극기를 든 촛불시민을 적대시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사진설명=화합과 조화의 상징이 탄핵 정국의 이념갈등에 휘말려 배제의 상징이 됐다. 친박단체들은 자신들에게만 태극기를 들 권리가 있다며 상대를 ‘국민이 아닌 자’로 규정했다. 그 반작용으로 대다수 시민들 사이에는 “태극기를 보기도 싫다”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지난 1일 3ㆍ1절 주말 집회에 태극기를 들고 나온 양측 집회 참가자들. 이원율 기자 / yul@heraldcorp.com]

촛불집회를 주최하는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은 “태극기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노란 리본을 단 태극기를 가져오라”고 했지만 그 당부가 오히려 아무 표시가 없는 태극기를 배제한 결과로 이어졌다. 경기도 부천시에 사는 김대기(43) 씨는 “3ㆍ1절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역사 현장 교육을 갔다가 집회에 왔지만 노란 리본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통에 숨길 수 밖에 없었다“며 당황스러워했다.

일제 식민치하의 가장 큰 피해자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함부로 태극기를 휘날리면 안된다”며 일갈했다. 이날 수요집회에 참석한 김복동(91) 할머니는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재판관들을 죽인다고 공갈, 협박해서야 되겠느냐”면서 “태극기도 날릴 때 날려야 한다”라고 꼬집었다. 음과 양의 조화, 하늘과 땅, 물과 불의 화합의 상징을 담은 태극기를 배제의 상징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준엄한 꾸중이다.

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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