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일반
피란의 상흔을 예술로…‘끼’ 부리는 ‘산’ 사람들
라이프| 2017-04-18 11:21
여행객 몰려드는 비석문화마을·감천문화마을·흰여울문화마을…부산사람 절반은 산에 자리잡고 산다

항도(港都)라지만, 부산(釜山)은 산이다. 부산사람 350여만명 중 절반이 산에 산다는 것은 ‘팩트(fact)’이다.

밤이 되면, 해운대, 광안리, 다대포, 송도, 영도 바다는 홍콩의 너댓 배쯤 되는 조명으로 휘황찬란한 야경을 뽐내고, 부산의 산은 세계에서 가장 덩치가 큰 비정형 빌딩이 된다. 프라하의 비정형 건물 ‘춤추는 빌딩(Dancing House)’은 새 발의 피. 부산의 거대한 비정형 빌딩은 파란만장 반전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통째로 품고 있다.

쿨하고 선 굵다던 부산 사람들이 요즘 ‘끼’를 부린다. 전쟁과 왜관, 왜정의 흔적을 ‘춤추는 부산’의 자양분으로 승화시킨 그들의 반전 매력이 놀랍다. 그 덕에 부산은 좁아터진 김해공항을 통해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일본, 동남아 등지의 관광객들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이다.

부산 흰여울문화마을은 이탈리아 친퀘테레 식으로, 소박하지만 우아하게 단장한 채 길게 늘어서 있다.

‘개판 오분전’

이 말은 부산에서 만들어졌다. 한국전쟁 당시, 영도, 자갈치, 남포동, 아미, 감천, 부민동 우암마을, 보수, 초량동에는 피란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우암마을 소(牛)막사를 개조하거나 산등성이를 깎은 뒤 ‘방 하나, 부엌 하나’ 규격화된 판잣집(기찻집)을 열차처럼 배열해 거대한 피란촌을 만들었다.

피란 정부가 배급하는 밥은 삶을 향한 최후의 보루. 관리는 솥 두껑을 열기 5분전에 ‘개(開)판 오분전“을 외쳤다. 배급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투는 대한민국 재건의 열정 같은 것이다. 들판에 차려진 제단(野壇:야단) 앞 설법하는 자리(法席:법석)에 가면 양식을 준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 중생 구제의 그 야단법석과 다르지 않다.

산복도로 서쪽끝지점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은 왜정 때 일본인의 공동묘지였다가 피란시절 ‘기찻집’들이 빼곡히 늘어섰던 곳이다. 부산사람들은 70여년전의 죽음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문화로 바꾸었다.

아미동 피란촌은 묘곽과 제단 위에 지어졌다. 나무기둥을 세워 잇고 판자로 벽을 매조지한 뒤 지붕은 판넬, 기름 코팅된 루핑지, 슬라브를 차례로 붙여 덮었다. 루핑지는 방수에선 뛰어나지만 불이 나면 걷잡을 수 없는 쏘시개가 된다. 수십년전 부산에서는 달동네 화재와 피란민 안식처인 교회당 설립이 많아, ‘났다 하면 불이요, 섰다 하면 교회’라는 말도 만들어졌다.

비석문화마을엔 삶과 죽음이 공존했다. 산 자는 고단한 피란 생활 속에서도, 식사때면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정한수를 떠다놓고 밥을 먹었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나온 유골로 납골탑을 만들어 매년 추모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아미동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 위에 골목골목, 집벽마다 그들 식의 벽화를 그려놓은 이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손톱이 까이는 사투 속에 마을을 일구면서 부모형제 못지않은 정을 나눴기 때문이다. 또 생사의 갈림길에서, 산자와 죽은 자가 공존했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생사의 경계를 없앤 추억들이 발을 붙들기 때문이다. ‘눈물젖은 두만강’의 고 김정구님의 어머니, 영화계 톱스타 김윤석의 아버지도 자식들 그렇게 출세했음에도 죽을때 까지 이마을을 지켰거나 아직도 지키고 있다고 ‘부산여행특공대’의 손민수 이사는 전했다.

이 마을에서 국제시장과 영도 초입 수리조선소 ‘깡깡이길’이 훤히내려다 보인다. 부산엔 세 아지매가 있다. 용접 상태를 점검하는 깡깡이 아지매, 제첩판매하는 제치아지매, 생선나르고 만지는 자갈치 아지매이다. 깡깡이촌은 컬러풀시티로 탈바꿈했다.

비석문화마을 산복도로변 아미골 학습센터에선 최민식(1928~2103) 사진작가의 대하 역사 다큐멘터리같은 작품을 볼 수 있다. 열살쯤 된 언니가 아기를 업고, 어미가 윗옷을 훌떡 걷어 올리고는 고기 비린내 날까봐 두 손을 뒤로 한 채 그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풍경은 생존을 향한 처절한 투쟁이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난리통 교실 밖으로 상체를 내민 채 책 보는 아이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의 지혜가 되었다.

아미동 동쪽 옆 감천문화마을 역시 피란촌이다. 온 달동네에 예술 작품이 뒤덮힌 문화촌으로 변신한 것은 주민들이 예술가들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인 우대 정책을 편 피렌체 르네상스의 한 조각을 본다. 마을 기업 예술매장에서는 고단했던 피란민 판자집 조차 귀여운 모형작품으로 태어났다. 바로 옆 부민동 우암마을에서는 한국전쟁 1129일 중 1023일 간 중앙행정부 역할을 했던 곳, ‘임시수도 기념관’을 만나게 된다.

산복도로는 피란촌 달동네 사람들을 수평으로 이어준 길이다. 초량동 이바구(이야기)길과 유치환의 우체통이라는 이름의 상징물이 있는 이유는 바로 연결과 소통이다. 이바구길 168계단은 평지에서 산복도로를 수직으로 이어주던 계단길이다. 숱한 스토리가 달동네를 세계적 관광지로 만들었기에 부산사람들은 이곳의 성공을 ‘스토리 노믹스’라 부른다.

연결에는 나눔이 있다. 산복도로 서쪽 암남동에 가난한 소년 소녀들의 아버지 알로이시오 신부와 마리아 수녀회, 소년의집이 있다면, 동쪽 초량동엔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의 ‘더 나눔 센터’가 있다.

부산관광공사는 ‘168계단’에 외국인도 손쉽게 다니도록 지난해 6월 8인승 모노레일를 놓더니, 어르신 스토리텔러께서 운전하는 3인승 전동 세발자전거가 관광객을 태우고 산복도로 일대를 도는 ‘이바구 자전거’를 새로 마련했다.

산에 살던 사람들은 평지와 바닷에서 나룻배꾼, 어부, 지겟꾼, 상인, 부두노동자, 간척근로자 등으로 일했다. 부산을 일군 사람들 대다수가 희망을 캔 곳은 나룻배가 자갈치로 드나드는 영도였다. 섬은 노동 대비 수확이 높은 곳이다.


영도를 대표하는 것은 태종대와 ‘부산의 친퀘테레’ 흰여울 문화마을, 절영해안산책로이다. 태종무열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뒤 말을 타며 활쏘기를 즐기던 곳이다. 절영 해안산책로의 왼쪽은 아미동 처럼 산자와 죽은자가 공존했던 흰여울 문화마을이 이탈리아 친퀘테레 식으로, 소박하지만 우아하게 단장한 채 길게 늘어서있다. 오른쪽엔 크고 작은 배를 품은 창망한 바다가 기암괴석들과 조화를 이룬다. 이바구길 보다는 작지만, 중간 중간 마을로 올라가는 수직 계단이 있다.

수십 점의 타일 모자이크 벽화와 동행하는 타이탄 길에는 겨우내 식었던 해수의 냉기를 따스함으로 바꾸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관광객과 시민들은 꽃과 신록, 바다, 문화마을, 모자이크 벽화가 만들어낸 5색 풍경 속에 봄을 재잘거렸다.

해송 중산간 길도 내고, 곳곳에 피아노계단, 출렁다리를 해놓은 모습에서 부산사람들의 아기자기함을 엿본다. 기암괴석 절벽 위 태종대 전망대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달동네를 치장하더니, 어르신들께 세발자전거를 몰게 한다. 핍박과 전쟁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채 르네상스를 꾀하고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도록 한 부산사람들이다. 요즘 ‘부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들뜨는 것은 버라이어티 여행 생태계 뿐 만 아니라, 선입관과는 달리 ‘끼’ 부리고 정 많으며 소프트파워까지 보이는 부산 사람들을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 같다.

함영훈 기자/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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