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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금융권 초병들에게 필요한 건 ‘명성자본’
뉴스종합| 2017-04-19 11:02
변방의 최전선에서 외적이 침입하는지 살피는 병사가 바로 초병(哨兵)이다. 고배율 망원경이나 적외선 감지센서 같은 감시 장비가 없던 그 옛날에는 초병의 ‘눈’이 가장 중요한 장비(?)였다. 때문에 초병을 뽑을 때 시력이 좋은 병사로 가려서 선별했다.

초병의 다른 요건 중 하나는 바로 ‘신뢰’였다. 좋은 시력으로 외적의 침입을 가장 먼저 감지했다고 해도 적들과 결탁해 북채를 놓아버린다면 제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가족과 이웃, 나아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조직원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아야 초병이 될 수 있었다.

격변하는 금융시장에서 초병의 역할을 하는 것은 회계법인과 신용평가사 등 자본시장의 문지기(Gatekeeper)들이다. 투자자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기업의 재무 상황을 정기적으로 살펴보고, 투자 가치가 있는지 등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다. 하지만 최근 금융권의 초병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딜로이트안진 회계법인은 대우조선해양을 감사하면서 5조7000억원대의 분식회계를 묵인ㆍ방조해 행정조치는 물론 검찰 조사까지 받게 됐다. 검찰에서는 안진이 분식 묵인 차원을 넘어서 회사의 회계 원칙에 반하는 회계처리 논리까지 개발해 제공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성문을 지켜야 할 초병이 문이 열리는 것을 방조한 것은 물론, 침입 경로까지 알려준 셈이다. 덕분에 정부는 대우조선의 상황을 낙관해 무리하게 살리기로 결정했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투자자가 손해를 감수하고 있다.

국내 자본시장의 게이트키퍼들에 대한 비판은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지난 2013년 동양그룹 사태 때도 신용평가사들이 사건이 발생한 후 줄줄이 신용등급을 낮추며 ‘뒷북 평가’라는 비난을 받았다. 2011년에는 모기업 덕에 후한 신용평가를 받은 LIG건설이 갑자기 법정관리를 신청해 투자자들을 ‘멘붕(멘탈 붕괴)’에 빠지게 한 사건도 있었다.

이처럼 자본시장 게이트키퍼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부실 감사나 평가 등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발각에 따른 예상비용에 비해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게이트키퍼들이 시장 참가자들에게 신뢰를 받는 이른바 ‘명성자본(Reputation Capital)’을 축적하지 못하다보니 당장 눈앞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부실 행위가 발각돼 행정조치를 받더라도 아무 문제없이 시장에 재진입할 수 있고, 심지어 제재 기록도 남지 않는다면 게이트키퍼들의 무책임한 처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명성자본은 하루아침에 축적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시장의 게이트키퍼부터 건전한 자본시장을 지키는 첨병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금융시장의 기본인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을 쌓아야 한다. 금융당국도 이들이 일감 구하기 경쟁에 매몰되지 않도록 영업권 가치를 유지해 주돼 건전한 경쟁이 이뤄지도록 해 중장기적으로 명성자본을 축적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carr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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