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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일간의 세계여행] 145. 낮과 다른 부다페스트의 밤…작품이 된 ‘서체니 다리’
라이프| 2017-05-03 09:59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부다페스트(Budapest)의 새벽이다. 프라하에서 출발한 국제 버스는 터미널 앞 대로변에 멈춘다. 여기서 메트로를 타고 호스텔로 가면 되지만 티켓을 끊을 수 없다. 체코 돈 코루나(Koruna)는 다 쓰고 왔지만 헝가리 화폐 포린트(Forint)가 한 푼도 없다. 터미널 건물로 들어가서 경찰관에게 물어 ATM을 찾는다. 숙소예약도 끝나서 이틀간 쓸 돈을 빠듯하게 찾아 메트로 10회권을 사서 숙소 근처로 온다. 밤차타고 도착해서 숙소를 찾는 일처럼, 조금 다른 듯해도 비슷비슷한 시스템에 적응 하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프라하의 아기자기한 풍경을 기대했지만 부다페스트는 전혀 다르다. 처음 도착한 생소한 거리에서 재빠르게 방향을 인지하고 모르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손짓발짓이라도 해서 목적지를 찾는다. 오늘 숙소도 대로변의 골목 쪽에 있는 것을 몰라서 헤매기는 했지만 무사히 도착한다. 승객을 기다리는 종점의 노란 트램이 부다페스트에 온 여행자를 환영해 준다. 


프라하를 떠나온 지 12시간이 채 안되는데 프라하는 저편으로 멀어졌다. 시간보다는 물리적인 거리가 심리적으로 더 크게 작용한다. 국경을 넘은 이곳은 체코가 아니라 헝가리다. 체크인 시간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배낭만 맡기고 거리로 나온다. 숙소가 번화가인 바치거리(Vaci utca)와 도나우(Donau)강변과 가깝다. 비가 내릴 듯 말듯 잔뜩 흐린 하늘을 이고 도나우 강변으로 향한다.

​강변 옆 철로에서는 노란 트램이 오간다. ​날씨가 나빠서인지 시간이 일러서인지 행인도 많지 않은 강변 트램의 난간에 피터팬 동상이 앉아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릎을 만지고 갔는지 다리 색깔이 바랜 피터팬을 혼자 마음껏 바라본다. 피터팬 동상 뒤의 철로와 도나우 강, 멀리 부다페스트 왕궁은 배경이다. 


바쁠 것 없는 여행자의 발걸음은 도나우 강변을 따라 간다. 얇은 패딩을 꺼내 입고 바람막이까지 입고 나선 길이지만​ 어지간히 쌀쌀하다. 하늘만큼 어두워진 강물에 바람이 불어 잔물결이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니 “도나우강의 잔물결”이라는 왈츠가 저절로 떠오른다.

​천천히 산책삼아 걸었는데도 어느덧 서체니 다리(Szecheny Ianchid)에 도착한다. 서체니 다리는 부다(Buda)지구와 페스트(Pest)지구를 연결하는 도나우강 최초의 다리이다. 예전에는 부다지구는 상류층이, 페스트지구에는 서민층이 거주하여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부다지구는 왕궁 등 역사적인 건축물이 많고 페스트 지구는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이다. 근대 서체니 다리의 건설은 부다페스트라는 거대도시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다리를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사자상과 다리 중간의 문이 19세기 말에 지어졌다는 서체니다리의 역사를 말해준다. 강변의 바람이 차갑지만 걷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씨다. 곧 비가 떨어질 것 같은 하늘과 바람 때문인지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사람들은 얼마 보이지 않는다.

다리 중간쯤 차도와 만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인도가 있다. 도나우강 풍경을 바라보며 강바람을 맞으며 무엇이 나를 떠나게 하고 여기까지 이끌었을까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다. 여행자로서의 반짝이는 호기심보다 여행이 끝나는데 대한 소회가 깊어진다. 어디론가 떠나고 낯선 곳을 헤매고 그곳이 익숙해지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다른 차원의 시간과 공간을 살고 있었는데 벌써 현실로 돌아갈 시기가 되었다. 기분 좋은 꿈속에서 깨어날 것을 자각한 것처럼 아쉬운 시점이다.

서체니 다리를 건너 신시가인 페스트지구에서 구기사인 부다지구로 넘어온다. 스산한 날씨 때문인지 사람은 많지 않아도 시티투어 버스와 관광버스는 돌아다닌다.

1880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담벼락의 그림이 구시가로 접어들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그저 다리를 건넜을 뿐인데 이편에는 저편과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왕궁으로 올라간다는 케이블카가 보인다. 이곳이 첫 여행지였으면 보는 것마다 신기했을 것인데, 이미 남미에서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실컷 보고 온 케이블카에는 감흥이 없다. 다만 이곳이 부다페스트 왕궁과 연결되는 교통편이라는 인식만이 자리 잡을 뿐이다. 


밤버스에서 지친 터라 오늘은 여기서 발길을 돌린다. 서체니 다리를 다시 건너며 부다지구쪽에서 바라보는 페스트 지구는 과연 현대적이다. 강 건너 보이는 빌딩숲 쪽으로 다시 걷는다. 체크인을 하기 위해 그 너머 호스텔이 있는 거리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강변의 전차 역에는 여전히 트램이 오간다. 강 건너 왕궁과 지나가는 노란 트램, 구름 가득한 하늘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여기서 보이는 왕궁을 섬세한 부조와 점자로 설명 해 놓은 동판으로 된 입체지도가 있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유적지를 더듬어 보게 하고 그 설명을 점자로 읽게 하는 이런 시스템은 처음 본다. 장애인들이 여행하기에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한 사람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시력이 아주 희미한 남편을 부인이 인도해가며 배낭여행하는 분들도 봤고 한쪽 다리가 절단된 여자 여행자가 예쁜 치마를 입고 목발을 짚고 걷는 것도 보았다. 유명관광지에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이런 시설이 설치 되어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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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번화가라는 바치거리를 걷는데 온종일 꾸물대던 하늘에서 드디어 비가 쏟아진다. 그칠 기세가 아니어서 건물입구에 그냥 서 있을 수는 없다. 이리 저리 뛰다가 맥도날드를 발견하고 얼른 들어간다. 한국에선 일 년에 한두 번도 가지 않는 곳이지만, 전세계 어디서나 같은 향기를 풍기는 맥도날드는 와이파이도 무료이니 나에겐 어디서건 고마운 존재가 되고 있다.

​지친 다리를 쉬며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다 호스텔로 간다. 여섯 명이 묵는 방의 이층침대가 배정된다. 이 여행에서의 마지막 잠자리다. 다음 숙소는 한국의 내 방이 될 것이다.

늦게 체크인을 하고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침대에 올라가 잠깐 눕는다. 날씨가 화창하면 좋으련만 부다페스트는 여행의 끝이라는 감상까지 더해져 우울하게 느껴진다. 같은 방에는 한국인이 둘이나 묵고 있다. 한 사람은 부다페스트에서 5일째 묵는데 날마다 비가 왔다며 하소연을 한다. 다른 사람은 나보다 4일 정도 먼저 프라하를 여행하고 왔는데 프라하에 있는 내내 비가 오더니 여기서도 비가 내린다고 한다. 내가 프라하에 있던 동안은 하늘이 너무 예뻤는데, 그전에 비가 많이 내린 여파였던 것이다. 계속되는 비는 여행자들을 우울모드에 빠지게 한다.

저녁도 먹을 겸 구경도 할 겸 바치거리로 나온다. 외투를 꽁꽁 싸맨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거리가 애잔하다. 기념품 가게도 기웃거리고 매장도 들락거리지만 흥이 나지 않는다. 


해지는 거리 벤치에 앉아 도나우강과 저편의 부다지구의 왕궁을 바라본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온종일 “끝”타령이다. 스산한 부다페스트의 저녁은 점점 어두워진다. 그래도 여행이 좋은 이유 수만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여행이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여행길에서는 해지는 모습을 매일 마주한다. 하루 동안 나를 비추던 태양이 어떻게 사라져 가는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풍요롭다. 고개를 들어 까만 하늘에서 달을 만나고 별을 헤아릴 수 있었던 아득할 것 같았던 매일 매일이 거의 소진되었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제자리를 찾게 되면 나는 이 여행길 위에서 만난 것의 얼마를 기억할 수 있을까? 도나우강의 서늘한 바람과 왕궁의 조명을 바라보던 오늘의 나는 이제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어느 순간 길위에서의 고독이 불현듯 떠오르거나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을 비추는 따사로운 햇살이 그리워지기도 할 것이다.

강변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하늘과 강은 어두워지고 왕궁과 서체니 다리를 비추는 조명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그렇게 아름답다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짙은 파랑으로 물들고 이미 조명이 비추고 있는 도나우 강은 하늘과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낮에 보았던 다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서체니 다리에 다다른다. 어둠이 가려주고 불빛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자태에 할 말을 잃는다. 프라하에서 떠나 부다페스트에 도착하기까지 내내 이 여행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치우쳐 있었다. 그렇게 안중에서 멀어진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운 야경은 여행자를 정신 차리게 한다.

서체니 다리는 낮의 어수선함을 벗어던지고 예술작품처럼 고고하게 도나우강위에 서 있다. 지나치는 자동차도 드문 밤의 서체니 다리 풍경은 그림이다.

다리 중간에 서서 밤의 도나우강 풍경을 즐긴다. 멀리서 유람선 한 척이 다가오나 싶더니 다리 아래로 사라져 버린다. 미지의 세상 밖으로 나와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갔던 147일간의 여행이 이틀을 남기고 있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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