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기사
[현장에서]‘코스닥 조숙증’ 치유할 코스닥위원장을 기다리며
뉴스종합| 2018-03-06 11:33
채소를 재배하는 방식 중에는 조숙(早熟)재배라는 수확법이 있다. 씨를 온상(hotbed)에 뿌려서 모종을 기른 뒤, 늦서리의 위험이 없어진 시기에 본 밭에 옮겨 심어 보통 재배보다 일찍 수확하는 방법이다. 수확량을 늘리기 위한 농업인들의 지혜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코스닥시장 활성화 대책’이 조숙재배를 떠오르게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아쉽게도 초점은 ‘지혜’에 맞춰져 있지 않다. 덜 자란 모종을 잡아 뽑는 일종의 ‘억지’가 닮았다는 지적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지금의 코스닥 활성화 대책은 코스닥 기업들이 거친 땅에 곧은 뿌리를 내리도록 돕는 것보다는 아직 덜 자란 기업을 끄집어 올려 키만 커 보이게 하려는 것에 가깝다”며 “코스닥 시장을 일종의 ‘테스트베드’로 여기는 듯하다”고 꼬집었다. 일반 투자자들에게 열려 있는 공개시장을 임상의 장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일지 의문이다.

실제 코스닥을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코스닥 상장 문턱을 낮추려는 기조가 대표적이다. 이미 코스닥은 해외 기술주 시장들과 비교해 상장종목수가 적지 않은 편이다. 현재 코스닥 상장기업은 1266곳으로,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한국의 3배인 일본의 중소기업 중심 시장 자스닥(744곳)보다 60% 이상 많다. 미국의 기술주 중심 주식거래 시장인 나스닥과 비교하면 상장기업 수가 절반에 못 미치지만, 한국의 경제규모는 미국의 12분의1 수준이다. 수확량은 이미 충분하다.

금융당국의 판단처럼 지금의 코스닥 문턱이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면, 이를 넘어선 현재의 상장사들이 비교적 우수한 성장세를 보여줘야 했을 터. 결과는 그렇지 않다. ‘

닷컴버블’이 꺼질 무렵인 2000년 9월 이후 코스닥 지수는 단 한 번도 1000을 넘긴 적이 없다. 성장성이 유망하다던 기업들로 범위를 좁혀봐도 실망감은 마찬가지다. 한국거래소는 적자기업이라도 성장성을 입증하면 코스닥에 상장할 수 있도록 ‘기술성장기업 상장특례’를 마련해 지난 2005년부터 적용해 왔다. 그러나 이를 통해 코스닥에 입성한 40여곳의 기업 중 상장 초기 내걸었던 영업이익 전망치를 실제로 달성한 곳은 1곳에 불과했다. 3분의1은 증권사 최근 1년새 보고서 하나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이들 기업은 ‘자본잠식이 아닐 것’이라는 요건을 충족했다. 지금 당국은 이들 기업보다 불안정한 자본잠식 기업들을 일반 투자자들에게 안내하고 있다.

코스닥 금융지원책은 중에는 새내기 상장사들의 자금조달을 오히려 더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낳고 있다. 자산운용사가 펀드자산의 절반을 벤처기업 신주와 초기 코스닥기업에 투자할 경우 코스닥 공모주 30%를 우선배정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안이 그 중 하나다. 기업공개(IPO)를 준비하는 기업과 그 상장주관사로서는 기관투자자 배정물량이 기존 50%에서 20%로 축소되는 상황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수요예측 과정에서 기관투자자들이 써낸 희망인수가격과 수량이 적정 공모가 산정의 토대가 되는데, 이들이 노리는 밥그릇이 작아지면서 ‘어차피 대형사 외에는 배정 못 받는다’고 여긴 소극적 기관들이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다. 수요예측이 흥행에 실패하면 기업이 조달하려는 자금 규모 역시 작아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어수선한 코스닥시장을 이끌 선장이 내정됐다고 한다. 서울은행 출신으로 금융위 자본시장조사심의위원, 한국증권학회장 등을 지낸 길재욱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가 최근 코스닥시장위원장 단독 후보로 추천됐다. 정부 정책에 따라 갈짓자 행보를 보이는 코스닥 시장에 독립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리다. ‘나스닥처럼’을 말하며 조급해 하는 정부와 거리를 유지하고 ‘코스닥처럼’을 고민할 뚝심이 필요해 보인다. 다행히 길 후보를 가까이서 봐온 한 금융권 인사는 그를 소신이 강한 학구파라고 평가했다.

“자금만 지원하기보다는 기업 여건에 맞도록 정부의 정책사업을 연계해 재정투입 성과를 높이는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길 교수는 1년 전 이맘때쯤 본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 갖고 있던 소신이 적기에 발휘되길 고대한다.

human@heraldcorp.com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