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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 시집]…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영혼
라이프| 2018-03-24 14:55
-이미혜 시인의 첫 시집…삶의 힘겨움과 슬픔을 녹여낸 시의 힘


[헤럴드경제=이해준 기자]2005년 계간 ‘시작’ 여름호로 등단한 이미혜 시인이 첫 시집을 냈다.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천년의 시작)라는 제목의 이 시집은, 부조리한 시간의 강을 건너온 시인의 고단한 삶과 사유가 애잔하게 담겨 있다.

그러면서도 고통과 슬픔에 무너지지 않고 끊임없는 성찰로 가치를 지키려는 시인의 강인하면서도 고집스런 의지가 오롯이 담겨 있다.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섬찍할 정도로 솔직한 고백과 시인의 절제된 언어다. 그리고 시 전편에 흐르는 슬픈 사랑과 순수한 영혼이다.

‘누군가에게/시 쓰는 어려움은/얄팍한 재능/감수성/상상력/매끈한 언어//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먼저/펜과 종이 위에 잠시 머물 수 있는/한 뼘의 서재/낙숫물처럼 떨어지는 생각이/고일 시간//나는 평생/그 알량한 시간과 공간을 위해/투쟁해 왔다’(‘시 쓰는 일의 어려움’)

어찌 시인만이 그러할까. ‘그 알량한 시간과 공간’은 메마르고 척박한 사회를 살아가며 젊은 시절의 꿈과 이상의 마모를 겪는 사람들 누구나 느끼는 그 ‘허기’가 아닐까.

고달픔 속에서도 시인은 시류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더 없이 강한 언어로 노래한다.

‘나는 채식이 싫다/저 푸성귀 가득한 식탁을 보면/맹렬한 허기를 느낀다/내 송곳니가 으르렁거린다/길들여지지 않은 욕망으로 짐승처럼/포효하고 싶다/나는 아직 충분히 먹지 못했다/저 가난한 풀 따위 걷어치우고 육식의 만찬으로 배를 불리며/기름진 살과 단단한 뼈로 무장하고 싶다/싸워 이기고 싶다’ (‘육식주의자’)

이미혜 시인의 시집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시집에는 시인의 가족사는 물론, 결혼과 육아, 가사, 비정규직 교사로서의 생활,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시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인의 관심은 세월호 참사와 대통령 탄핵, 전쟁과 평화, 장애인의 슬픔 등 생을 둘러싼 사회적 이슈에도 뻗쳐 있다.

‘민주주의가 기화요초 만발한 뜨락이라면/나는 오늘 잡초 한 움큼이 솎아내지는 것을 보았다/(중략)/잡초를 솎아낸 손은/그 모양이 눈에 거슬린다며/꽃 같지도 않은 것이 이 뜨락의 정체성을 위협한다며/단숨에 뽑아버렸다/(중략)나는 오늘 그렇게/민주주의의 뿌리가 뽑히는 것을 보았다’(‘진보당 해산 소식을 접하고’)

시집 곳곳에서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제 전통과 부조리한 사회, 폭력이 내면화된 세계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몸짓이 농밀한 언어로 다시 살아난다. 그 중심에는 연민과 분노와 눈물, 그리고 공감이 있다.

‘(전략)그렇다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소리는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다/오래전에 내 우물에 잠든 음성/철사줄로 묶인 연민과 분노와 눈물/목마르고 허기진 마음의 돌들이 단단히 들어차 넘치는 것이다/깊숙한 내부에서 어린 음성이 깨어/쩔뚝거리며 마음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다//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다/마음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다/애초에 사람들 사이를 딛고 온 마음/사람들 사이를 딛고 걸어나가는 것이다’(‘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지난 17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린 시집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출간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이미혜 시인.

문학평론가 유성호(한양대 교수)는 이 시집을 “‘목마른 정신의 뿌리를 적셔줄 깊은 우물’까지 들여다봄으로써 자기확인과 갱신의 의지를 담아낸 진정성 있는 고백록”이며 “‘피가 타들어 가던 시절’에 대한 존재론적 비가(悲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미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그런 가운데 가뭄에 콩 나듯 시가 나왔다. 1년에 한 편, 또는 몇 년 동안 한 편도 쓰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도 무슨 숙제처럼 그것들을 붙들고 있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시집을 엮게 되었다.”

힘겨운 시간을 헤쳐온 이미혜 시인에게 시는 생을 지탱해주는 힘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를 읽는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이 시가 가진 본원적인 힘이며, 이 시집의 장점이다.

일상의 굴레가 고단하고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는 시집, 그리고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에너지, 아련하면서도 애틋한 마음의 울림을 경험하게 하는 시집이다.

/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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