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유물유적
고려 옥쇄, 조선초에도 썼다…개국공신교서 날인
라이프| 2018-04-25 10:22
이성계가 사위 이제에 내린 교서 국보로
익산 미륵사지 사리장엄구 등 4건 보물로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갑작스런 이성계 군부의 역성 혁명으로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개국했지만, 체제가 정비되지 않아 조선초까지도 고려국왕의 어보(옥쇄)를 조선 임금의 결재 때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이 25일 국보 승격을 예고한 ‘이제 개국공신교서(李濟 開國功臣敎書)(현재 보물 제1294호로 지정돼 있음)는 1392년(태조 1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 개국 일등공신 이제(李濟, ?~1398)에게 내린 공신교서이다.

국보 지정 예고된 이제 개국공신교서

‘이제 개국공신교서’는 개국공신교서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사례이다.

이제 교서 끝부분에는 발급 일자와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어보(御寶)가 찍혀 있다. 이 어보는 1370년(공민왕 19년) 명나라가 보내준 고려국왕의 어보로서, 조선 개국 시점까지도 고려 인장을 계속 사용한 사실을 말해준다.

‘이제 개국공신교서’는 조선 최초로 발급된 공신교서이자 현재 실물이 공개되어 전하는 유일한 공신교서이며 여말 선초 서예사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도 높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교서는 국왕이 직접 당사자에게 내린 문서로서, 공신도감(功臣都監)이 국왕의 명에 의해 신하들에게 발급한 녹권(錄券)에 비해 위상이 높다. 녹권은 공신 칭호를 받은 사람에게 내려준 포상 내용을 기록한 문서이다.

조선 초 녹권으로는 ‘이화 개국공신녹권(李和 開國功臣錄券)’ 1점이 국보 제232호로, 개국원종공신녹권 7점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제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셋째 딸 경순궁주(慶順宮主)와 혼인한 뒤, 고려말 장인인 이성계를 새 왕으로 추대하는 일을 주도했다.

이화는 조선 전기 문신으로 태조 이성계의 이복동생이다. 고려 충신 정몽주 살해 사건 등에 개입했고 1,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했다.

즉, 이제나 이화나 모두 이성계의 친인척들이다.

보물 지정 예고된 미륵사지 사리장엄구

한편, 보물로 지정예고된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益山 彌勒寺址 西塔 出土 舍利莊嚴具)’는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心柱石, 탑 구조의 중심을 이루는 기둥)의 사리공(舍利孔, 불탑 안에 사리를 넣을 크기로 뚫은 구멍)과 기단부에서 나온 유물로, 639년(백제 무왕 40년)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사리외호(金銅舍利外壺) 및 금제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 각종 구슬과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靑銅合) 6점으로 구성돼 있다.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사리를 불탑에 안치할 때 사용하는 용기나 함께 봉안되는 공양물(供養物) 등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말로, 의식에 맞추어 사리를 봉안하는 데 필요한 기구(器具)를 빠짐없이 갖추어 둔 것이라는 뜻에서 ‘사리갖춤’이라고도 한다.

‘금동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 주목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양감과 문양의 생동감이 뛰어나 기형(器形)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도 최고급 금속재료를 사용하여 완전한 형태와 섬세한 표현을 구현하여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자료이므로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문화재청은 이밖에 이숙기 좌리공신교서(李淑琦 佐理功臣敎書),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粉靑沙器 象嵌 ‘景泰5年銘’ 李先齊 墓誌)’,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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