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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가 낳은 변화…동경·체념 교차하는 ‘新부자관’
뉴스종합| 2019-07-26 10:53
연세대에 다니는 것으로 추정되는 학생이 과거 해당 대학 대나무숲 게시판에 올린 글. [온라인커뮤니티]

[헤럴드경제=천예선 기자] ‘유튜버 vs 명문대생’

최근 6세 유튜버 ‘보람튜브’의 가족회사가 95억원 상당의 강남 빌딩을 매수한 사실이 알려지며 과거 연세대 대학생이 유튜버를 보고 느낀 허탈감을 쓴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당연히 열심히 공부한 내가 그들(유튜버)보다 성공할 것이라는 자만심이 있었다. 대기업에 들어가도 수입이 인플루언서들의 반의 반도 안될 거라는 생각에 의욕이 떨어진다”는 것이 골자다.

한국 사회가 저성장·성숙사회에 진입하면서 부자관(富者觀)도 바뀌고 있다.

교육의 목표인 수월성(秀越性·국영수 등 모든 부분에서 월등)이 더이상 부를 가져다줄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개발경제 시대의 ‘수월성’보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창출하는 능력을 가질 때야 비로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튜버’와 같은 사례가 속출하는 것이 방증이다.

여기에 계층이동의 틈이 좁아지면서 양극화가 심화하자 부자를 바라보는 시각도 동경과 체념이 교차하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6월 25~27일 전국 성인 1003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부자에 대한 인식’을 설문조사한 결과, 한국인은 평균적으로 24억원 정도를 가진 사람을 부자라고 여겼다. 이번 조사는 1993년과 2014년에 이은 세 번째 조사다.

‘부자라고 할 만한 자산 규모’에 대한 답변으로는 ‘10억원’이 30%로 가장 많았고, ‘20억원’(15%), ‘30억원’ ‘50억원’(이상 9%), ‘5억원’ ‘100억원’(이상 7%), ‘3억원’(2%) 순이었다. 이를 평균해 보면, 한국인이 생각하는 부자의 자산 규모는 평균 24억원이다. 2014년 조사에서는 평균 25억원으로 비슷했으나, 1993년의 평균 13억원과는 차이가 컸다.

앞으로 부자가 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부정적인 답변이 지배적이었다.

현재 부자가 아닌 사람(820명) 기준, ‘앞으로 부자될 가능성 있다’고 답한 비율이 32%인 반면, ‘가능성 없다’는 응답이 61%에 달했다. 조사대상의 10%는 ‘나는 이미 경제적으로 부자’라고 답했다.

‘부자가 더 행복할까’를 묻는 질문에는 ‘부자가 보통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30%, ‘더 불행하다’ 12%, ‘비슷하다’ 45%로 나타났다.

5년 전에 비하면 부자에 대한 동경은 더 강해졌다. 당시 ‘부자가 더 행복’이라는 응답은 24%인 반면 ‘부자가 더 불행’은 18%였다.

1993년 한국갤럽의 동일 질문에 대해서는 51%가 ‘부자는 보통 사람과 비슷하게 행복하다’, ‘더 행복하다’와 ‘더 불행하다’가 각각 22%로 나타난 바 있다.

1993년, 2014년, 2019년을 비교하면 여전히 한국인의 절반 가까이는 행복 면에서 부자와 보통 사람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점차 ‘부자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증가한다고 볼 수 있다.

부자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부정적이지만 5년 전보다는 다소나마 개선됐다.

‘아는 부자 중에 존경할 만한 사람이 더 많다’가 23%인 반면 ‘그렇지 않다’는 59%로 집계됐다. 그러나 2014년 ‘존경할 만한 부자가 많다’ 19%, ‘그렇지 않다’ 66%였던 것과 비교하면 격차가 줄었다.

가장 존경할 만한 부자로는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9%)이 5년 전 조사에 이어 1위에 꼽혔다. 이어 유일한 전 유한양행 회장(7%),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5%),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4%),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이상 3%), 함영준 오뚜기 회장(2%) 순이었다.

2% 이상 언급된 부자 일곱 명 중에 이병철 전 회장,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가(家) 3대가 포함된 점이 눈길을 끌었다.

이홍 광운대 교수(경영학과)는 ‘이재용-이건희-이병철’로 순위가 나타난 것과 관련, “젊은 층에서 이병철 전 회장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최근 언론 노출 빈도 등 최신성 효과가 작용한데다 이재용 부회장이 ‘글로벌 기업’ 삼성의 후광효과를 비롯 5년 전부터 와병 중인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을 이끌고 있는 것도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주영 명예회장이 5년 전에 이어 꾸준히 1위에 오른 것은 소떼를 몰고 가 남북교류 물꼬를 트고 밑바닥부터 고생해서 한국 경제를 일군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많이 각인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조사에서 부자의 요건을 묻는 질문에서는 ‘본인 노력/능력이 더 중요’가 36%에 그친 반면 ‘부모 재산/집안이 더 중요’는 57%로 나타났다.

5년 전과 비교하면 ‘부모 재산/집안’은 4%포인트 증가했고, ‘본인 노력/능력’은 그만큼 감소했다. 1993년 유사 질문에서는 70%가 ‘능력/노력’을 꼽았고 ‘배경/가문’ 응답은 8%에 불과했다.

이는 한국 경제가 고성장 일로에 있던 1960~70년대 경험에서 비롯한 고령층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믿음은 점차 사라지고, 2019년 현재 구직과 경제 활동 중심축을 이루는 세대는 개인의 부(富)가 ‘물려받은 재산‘으로 결정된다는 시각이 강해진 것으로 분석됐다.

이홍 교수는 “성장이 정체된 성숙사회는 기존 질서대로 움직이는 힘이 강하다”며 “이같은 질서 속에서 부모나 집안의 재산이 물려지지 않는 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지금은 부동산 등 인플레이션을 이용해 부를 키울 수 있는 기회도 적어 젊은층의 좌절감이 기성세대보다 더 크다”며 “과거 개발기는 파이가 커지는 사회였지만 지금은 파이가 정체되면서 그 안이 더욱 촘촘하게 구성된다. 성장이 멈춘 사회의 공통점은 그 촘촘한 그물코 속에서 제도적인 힘에 눌려 리스크를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심히 뛰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률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커지면서 사회가 경제적으로 위축되고 있다는 의미”라고 진단했다.

che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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