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경제
[인터뷰] 김순자 명인 “佛 르꼬르동블루 같은 김치학교 꿈꿔요”
뉴스종합| 2019-08-08 09:01

[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김치가 없었으면 죽었을 목숨이니까. 김치 덕분에 이렇게 살아서 2세, 3세도 보고, 직원 400명 가까이 있는 기업까지 일군 것에 감사한 마음이죠. 김치를 더 많이 알리고 사랑받게 하는 게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지난달 24일, 경기도 부천시 한성식품 본사에서 만난 김순자(65) 한성식품 대표는 업무 차 해외 출장에 나섰다가 이날 새벽에 막 귀국한 참이었다. 김 대표는 60대 중반 나이에도 일년에 15~16차례는 해외 출장길에 오른다. 이번 출장처럼 바이어와 수출 논의를 할 때도 있지만, 해외 박람회 등에서 우리 김치를 알리는 ‘김치 전도사’ 활동을 자처한다.

김치 제조사를 이끄는 기업인이자, ‘대한민국 김치명장 1호’의 무게가 그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대한민국 명장은 동일 분야에서 15년 이상 종사하며 최고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이에게 주어지는 타이틀이다. 이처럼 공인된 전문성에 더해 그의 남다른 김치 사랑도 쉼 없는 행보의 원동력으로 꼽힌다.

지난달 24일 경기도 부천시 한성식품 본사에서 만난 김순자 대표가 한성식품의 다양한 특허김치를 소개하고 있다. [제공=한성식품]

▶“김치는 단순 음식 넘어 삶의 일부, 삶 그 자체”=김 대표가 김치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특별하다. 특이 체질 탓에 어린시절 그가 유일하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 김치였다. 마당에서 놀다가도 김치 만드는 소리만 나면 부엌으로 달려갔다. 김치 담그는 날은 그에게 잔칫날이나 다름 없었다.

먹을 수 있는 게 김치 밖에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김치 맛에 누구보다 예민했다. ‘아침에 담근 김치가 저녁이면 왜 맛이 없어질까’, ‘장독 밑바닥 쪽 김치는 왜 짤까’… 김 대표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뒤를 쫓아다니며 하루에도 수십 번 질문을 쏟아냈다. 궁금증은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김치에 대한 애정과 타고난 호기심이 지금의 김 대표를 있게 한 셈이다.

까탈스러운 딸 입맛도 만족시킬 만큼 김 대표의 어머니는 김치 담그는 솜씨가 탁월했다. 그 김치를 먹고 자란 그가 사회에 나와 보니 맛있는 김치 찾는 일이 어려웠다. ‘내가 김치를 만들어서 맛없는 김치 때문에 고통스러운 사람을 돕고, 외국인에게도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 한성식품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김치는 김 대표에게 삶을 연명하게 해준 고마운 음식이자 삶 그 자체가 됐다.

▶지역마다 다른 입맛에 고충도…연구 매진하며 경쟁력 갖춰=김 대표는 물려받은 음식 솜씨에 타고난 미각을 믿었다. 1986년 한성식품 문을 열 당시엔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막상 사업은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했다”고 창업 초기를 떠올렸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죠. 경영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사업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였어요. 제품을 납품해도 돈은 석 달 뒤에나 들어오니 늘 쪼들렸어요. 괜히 시작했다 싶었죠.(웃음)”

김치 맛에는 자신 있었지만 이를 사업화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지역별로 고유의 김치문화가 있다보니, 각기 다른 입맛을 두루 만족시키는 일이 까다로웠다. A 납품처에서 마늘 맛이 부족하다고 해서 더 넣으면, B 납품처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그 시절 김 대표는 집에 들어와 자주 울었다.

사업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김치마저 포기한다면 다른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차라리 빨리 성공한 뒤에 때려치우자’ 싶기도 했다. 출신지역 구분 없이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김치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4개월여 연구에 매달렸다. 그렇게 만든 3가지 샘플을 가지고 다니며 사람들 반응을 살폈다.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레시피를 토대로 표준화된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김 대표는 연구를 거듭해 ‘깻잎양배추말이김치’, ‘미역말이김치’, ‘동결건조김치’ 등 여러 특허김치를 내놨다. 제조법을 넘어 숙성도 관리에 이르기까지 한성식품은 총 28건(국내 27건, 국외 1건)의 김치 관련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김치 재료를 다듬는 김순자 한성식품 대표 [제공=한성식품]

▶“우리김치 가치 더 널리 알릴 것…김치학교 설립 목표”=시대 변화와 함께 김치를 사먹는 소비자들은 늘고 있다. 하지만 업계는 낙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값싼 중국산 김치가 밀려들어와 시장을 잠식한 탓이다. 특히 기업간거래(B2B)시장의 70%는 중국산 김치가 차지하고 있다.

김 대표가 찾은 해법은 저가 공세에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김치의 가치를 더 널리 알려나가는 것이다. 김치 담그기 체험 등 행사를 통해 1020세대와 소통에 힘쓰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지난 2012년부터 ‘김순자명인 김치테마파크’를 거쳐간 어린이는 2만명이 넘는다. 어린이·중고등학생 뿐 아니라 외국인도 지난해만 300여명이 김치테마파크를 다녀갔다.

김순자 한성식품 대표가 강원도 정선 '김순자명인 김치테마파크'에서 함백중학교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제공=한성식품]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해외 행사장에서 김치를 전시하면 냄새 난다고 빼라고 실랑이가 벌어졌어요. 지금은 김치가 있다고 하면 외국인 관람객들이 일부러 찾아 와요. ‘한국 김치가 직접 왔다는데 이런 영광이 어딨느냐’고 팔라고 그래요. 정작 국내에선 중국산 김치가 활개치고 우리 김치가 외면 받는 걸 보면 안타깝죠.”

김 대표는 김치산업 발전과 세계화를 위해선 정부의 노력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배추가 비쌀 때는 한 통에 1만원이 넘어가는 등 가격이 들쭉날쭉이다. 이같은 농산물 수급 불안정 탓에 주문이 쇄도해도 대량 주문을 받기 힘든 형편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성식품 등 수출기업들이 고용 및 농가소득 창출 뿐 아니라 국가 브랜드 향상에도 기여하는 만큼 세제 감면이나 자동화설비와 같은 실질적 지원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끝으로 김 대표는 “우리가 우리 김치를 아끼지 않으면 누가 아끼겠느냐”며 “훌륭한 국가 브랜드인 전통김치를 민관이 힘을 모아 계승·발전시켜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김치 제조법과 보관법 등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김치전문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우리 김치인데 김치에 대해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곳이 국내에 없다는 게 말이 안되죠. 각국 유명 셰프들이 한국 김치를 배워가서 세계 무대에서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프랑스 르 꼬르동 블루 못지 않은 김치전문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제 최종 목표입니다.”

ha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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