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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 닫는 기업들…하반기 투자 ‘주저’
뉴스종합| 2019-09-05 10:27

[헤럴드경제=천예선 기자] 미중 무역분쟁, 일본 수출규제에 따른 한일 갈등, 미국 금리인하, 글로벌 장기불황….

지난 3개월새 한국 경제를 덮친 거대한 불확실성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국내 기업들은 동시다발로 쏟아지는 대외 변수로 하반기 투자가 위축되고 내년 사업계획 수립에도 적지않은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대기업 관계자는 “경기가 나쁘더라도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선제투자를 하는 것이 기업이지만 지금은 미래에 대한 담보가 없다고 판단해 이미 수립된 투자도 늦추는 세부조정에 들어간 기업들이 많다”며 “경기둔화가 지속되면서 추후 프로젝트 단위에서 투자 규모를 축소하거나 투자 자체를 보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반기 보수적 투자 집행 불가피= 국내 기업들은 세계 경기둔화에 한국 경제 저성장, 그리고 대내외 불확실성 증폭으로 하반기 투자 집행을 주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 6월 110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하반기 기업 경영환경 전망에 따르면, 올 하반기 국내 주요기업들의 투자종합지수는 상반기 대비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반기 종합지수 107.4포인트에서 하반기는 106.5포인트로 소폭 줄었다.

또 “하반기 투자를 상반기보다 늘리겠다”는 기업 비중은 35.4%에 불과했고, “향후 투자여건의 개선가능성이 부정적”이라는 응답은 65.7%에 달했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신유란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원은 “6월 조사 이후 일본의 수출규제가 터지면서 기업들의 투자심리는 더욱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며 “글로벌 수입 수요도 둔화해 국내 수출기업들은 하반기 투자를 조정하거나 보수적으로 잡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소기업계는 더 심각하다. 중소기업 10곳 중 9곳은 올해 하반기 투자 확대나 신사업 진출 계획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6월 전국 중소기업 500개사를 대상으로 ‘중소기업 경영애로 및 하반기 경영전략’을 조사한 결과, 86.4%가 하반기 경영전략으로 ‘내실을 다지거나(60.2%), 사업 축소 등 생존우선(26.2%) 전략을 구상 중’이라고 답했다. 투자확대(5.6%), 신사업·신기술 도입(8%)을 계획 중인 기업은 13.6%에 불과했다.

김기문 중기중앙회 회장은 “많은 중소기업이 미래를 위한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며 “중소기업이 경제심리를 회복하고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나설 수 있도록 적극적인 경기부양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자료]

▶경영환경 ‘시계제로’ 내년 사업계획 차질= 올 하반기보다 더 큰 문제는 내년이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통상 6월에 내년도 사업계획을 짜기 시작해 11월에는 확정짓는데 지난 3개월동안 일본 수출 규제, 미국 금리인하 등 뜻밖의 변수가 많이 발생해 내년도 사업계획을 잡지 못하고 있다”며 “전략·기획 부서들은 예측 범위를 넘어선 불확실성으로 시나리오별 대응책 마련도 힘든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달 2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내년도 투자 계획은 완료되지 않았다”며 “최근 대외 불확실성 상황에서 시장 변동성이 높아진 만큼 탄력적인 투자경영이 중요해졌다. 과거에 비해 투자 검토 빈도를 늘려 시장 수요변동에 최대한 빨리 대응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그러나 대내외 악조건 속에서도 중장기 투자계획을 차질없이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지난달부터 전국을 돌며 현장경영에 나서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6월 비상경영을 가동하면서 “경제활성화 180조 투자와 4만명 채용, 시스템반도체 133조원 투자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라”라고 당부한 바 있다.

다만 지난달 말 이재용 부회장의 국정농단 관련 대법원 판결에서 파기환송이 결정되자 삼성의 미래투자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 삼성디스플레이는 중국의 액정표시장치(LCD) 저가공세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대형 디스플레이 사업을 LCD에서 OLED(유기발광다이오드)로 전환투자에 나설 계획이었지만, 이 부회장의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관련 투자계획을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도 2분기 컨콜에서 D램 생산량 감소에 대한 질문에 “전체적인 캐파(생산능력)의 감소량에 대해서는 투자계획이 셋팅돼 있지 않아 현 시점에서 구체적인 수치로 말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내외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기업 투자를 촉진하는 유일한 방법은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 수단’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홍성일 한국경제연구원 경제협력팀장은 “기업 입장에서 미국과 중국, 일본, 북한 등 대외 여건은 제어하기 힘들다”면서 “대내적으로도 경기부진이나 소비둔화, 일자리 부족 등은 구조적인 문제여서 기업이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유일하게 남은 것이 정책수단이다. 정부는 기업의 투자촉진을 위해 규제를 가중시키는 공정거래법이나 상법 등 정책적 불확실성을 줄여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조절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국회에 규제완화 시그널을 주고 기업의 투자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세제지원이나 행정 간소화 등의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유란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원은 “국내 IT산업의 경우 중국보다 규제장벽이 높아 산업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며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규제개혁을 통해 신산업을 태동·발전시켜 기업의 투자금이 흘러들어가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che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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