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가급락·수요급감 ‘잔인한 봄’
1년새 현금보다 차입금 더 늘어
항공사·주유소 납부유예도 ‘골치’
정부, 관세·수입부담금 한시면제
정제마진 급락과 석유수요 급감으로 사상 초유의 악재에 직면한 정유업계가 심각한 현금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다. 매달 원유 도입 계약에 따른 구매 대금과 고정비로 현금이 지출되는 데 반해, 재고량 폭증과 그나마 판매됐던 항공유와 주유소들의 결제 대금 납부까지 미뤄지자 현금 곳간이 급격히 비어가고 있다.
당장 돈 줄이 말라가는 정유사들은 단기 자금 성격의 기업어음(CP) 발행 시장에서 조 단위의 긴급 자금을 조달해 급한 불 끄기에 나섰지만 여전히 좌불안석이다. 원유수입 시 부과되는 관세의 추가 연장을 비롯해 석유수입부과금 유예와 전략비축유 매입 등의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7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 SK에너지는 CP 시장에서 6650억원을 조달했다. 같은 기간 현대오일뱅크의 4200억원까지 합하면 양사는 총 1조원 넘는 자금을 CP 시장에서 긴급 수혈했다. 굴지의 정유사들이 회사채 시장이 아닌 CP 시장에서 조 단위의 자금을 조달하는 건 극히 이례적이다. 장기 자금 조달처인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CP 발행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다.
실제 정유사들의 현금 흐름은 심각하다. 공장을 가동해도 최근 제품 판매가 뚝 끊긴 탓에 생산을 거듭할수록 비용만 늘어날 뿐 정유사들이 손에 쥐는 현금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국내 정유4사(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의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말 연결 기준 순차입금(총차입금-현금성자산)은 전년보다 40.8% 증가한 21조4111억원으로 나타났다. 1년간 현금성자산보다 갚아야 할 빚이 더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이는 정유업계의 불황이 절정에 달했던 지난 2014년 19조4449억원을 넘어선 수준이다.
문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올해 정유사들의 현금 동원 능력이 더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 차량 운행이 줄고 항공 노선이 끊기면서 정유사들의 휘발유와 항공유 판매는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올해 2월 국내 휘발유와 항공유 소비량은 작년 동기 대비 각각 5.9%, 4.4% 줄었다. 3월 소비는 이보다 더 큰 폭으로 감소했을 것이란 전망이다.
여기에 경영난에 빠진 일선 주유소와 항공사들이 구매대금 납부까지 미루면서 정유사들의 재무부담은 한층 가중되고 있다. 정유사의 한 관계자는 “항공유는 평소보다 20%가 덜 팔린 상황인데도 항공사들이 앞다퉈 대금 지불을 유예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난감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달까지는 그나마 덤핑으로는 판매되던 항공유가 4월부터는 재고로 쌓이기 시작하고 있다. 재고량 급증은 향후 보다 심각한 현금난으로 번질 수 있다.
이처럼 심각한 수요부진 속에서도 정유사들은 산유국과의 장기 계약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현금을 지불하며 원유를 들여오고 있다. 최근 원/달러 환율 급등으로 원유 구매에 따른 부담 또한 커졌다.
이처럼 상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정부는 원유 수입에 부과되는 관세와 석유수입부과금의 한시적 면제 등을 골자로 한 정유업계의 요구를 일부 수용키로 했다. 정부는 우선 석유 수입부과금 납부를 3개월 미뤄주기로 했다. 약 3500억원의 부담이 덜어질 것으로 추산된다.
또 정유사가 중동 외 지역에서 원유를 수입할 때 운송비 초과분을 환급해주는 요건도 완화할 방침이며, 지난달 발표한 ‘원유 관세 2개월간 유예’도 추후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연장 여부를 검토할 방침이다. 김현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