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반
굴지의 정유사마저 자금난…CP시장서 1조 긴급수혈
뉴스종합| 2020-04-07 11:33

정제마진 급락과 석유수요 급감으로 사상 초유의 악재에 직면한 정유업계가 심각한 현금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다. 매달 원유 도입 계약에 따른 구매 대금과 고정비로 현금이 지출되는 데 반해, 재고량 폭증과 그나마 판매됐던 항공유와 주유소들의 결제 대금 납부까지 미뤄지자 현금 곳간이 급격히 비어가고 있다.

당장 돈 줄이 말라가는 정유사들은 단기 자금 성격의 기업어음(CP) 발행 시장에서 조 단위의 긴급 자금을 조달해 급한 불 끄기에 나섰지만 여전히 좌불안석이다. 원유수입 시 부과되는 관세의 추가 연장을 비롯해 석유수입부과금 유예와 전략비축유 매입 등의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7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 SK에너지는 CP 시장에서 6650억원을 조달했다. 같은 기간 현대오일뱅크의 4200억원까지 합하면 양사는 총 1조원 넘는 자금을 CP 시장에서 긴급 수혈했다. 굴지의 정유사들이 회사채 시장이 아닌 CP 시장에서 조 단위의 자금을 조달하는 건 극히 이례적이다. 장기 자금 조달처인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CP 발행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다.

실제 정유사들의 현금 흐름은 심각하다. 공장을 가동해도 최근 제품 판매가 뚝 끊긴 탓에 생산을 거듭할수록 비용만 늘어날 뿐 정유사들이 손에 쥐는 현금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국내 정유4사(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의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말 연결 기준 순차입금(총차입금-현금성자산)은 전년보다 40.8% 증가한 21조4111억원으로 나타났다. 1년간 현금성자산보다 갚아야 할 빚이 더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이는 정유업계의 불황이 절정에 달했던 지난 2014년 19조4449억원을 넘어선 수준이다.

문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올해 정유사들의 현금 동원 능력이 더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 차량 운행이 줄고 항공 노선이 끊기면서 정유사들의 휘발유와 항공유 판매는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올해 2월 국내 휘발유와 항공유 소비량은 작년 동기 대비 각각 5.9%, 4.4% 줄었다. 3월 소비는 이보다 더 큰 폭으로 감소했을 것이란 전망이다.

여기에 경영난에 빠진 일선 주유소와 항공사들이 구매대금 납부까지 미루면서 정유사들의 재무부담은 한층 가중되고 있다. 정유사의 한 관계자는 “항공유는 평소보다 20%가 덜 팔린 상황인데도 항공사들이 앞다퉈 대금 지불을 유예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난감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달까지는 그나마 덤핑으로는 판매되던 항공유가 4월부터는 재고로 쌓이기 시작하고 있다. 재고량 급증은 향후 보다 심각한 현금난으로 번질 수 있다.

이처럼 심각한 수요부진 속에서도 정유사들은 산유국과의 장기 계약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현금을 지불하며 원유를 들여오고 있다. 최근 원/달러 환율 급등으로 원유 구매에 따른 부담 또한 커졌다.

이처럼 상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정부는 원유 수입에 부과되는 관세와 석유수입부과금의 한시적 면제 등을 골자로 한 정유업계의 요구를 일부 수용키로 했다. 정부는 우선 석유 수입부과금 납부를 3개월 미뤄주기로 했다. 약 3500억원의 부담이 덜어질 것으로 추산된다.

또 정유사가 중동 외 지역에서 원유를 수입할 때 운송비 초과분을 환급해주는 요건도 완화할 방침이며, 지난달 발표한 ‘원유 관세 2개월간 유예’도 추후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연장 여부를 검토할 방침이다. 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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