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조선왕실의 반쪽 후궁의 실체
라이프| 2021-01-15 08:16

조선시대 국왕의 배우자를 가리키는 왕비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왕은 세종이다. 세종은 종래 미호를 붇여 ‘덕비’ ‘숙비’로 부르는 게 옳지 못하다며, 왕비로 부를 것을 요청했다. 이후 왕비라는 경칭 외에 중전, 중궁, 내전이라는 호칭도 사용됐다. 그렇다면 후궁이라는 칭호는 어떨까?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의, 귀인 등 후궁의 작위 외에 궁녀, 궁인, 궁첩, 궁빈, 옹주, 빈궁, 잉첩 등 다양한 호칭이 기록돼 있다. 이들의 신분은 노비, 과부부터 사대부 출신까지 다양했다.

조선시대 후궁의 존재와 제도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한 ‘조선왕실의 후궁’(지식산업사)은 왕실주변부가 아닌 어엿한 왕실의 일원으로서 후궁의 존재를 새롭게 조명한다. 이미선 교수는 조선조 후궁 175명의 역할과 위상을 내명부(內命婦)제도와 조선왕실 운영의 변천에 맞춰 명쾌하게 규명했다.

저자는 우선 후궁의 개념을 간택의 유무에 따라 간택 후궁과 비간택 후궁으로 나눈다. 종래 간택 후궁과 승은 후궁이란 분류가 다양한 입궁 경로와 출신 성분을 가진 후궁의 존재 양상을 포괄하지 못한다고 본 때문이다.

후궁의 위상은 여러 번 바뀐다. 전기(태조~성종조)엔 비간택 후궁에 노비, 과부, 첩녀 등 다양한 출신의 여성들이 포함됐으나 후기(영조~고종조)엔 정식 절차를 거친 궁인 출신들이 많아졌다.

성리학적 질서와 명분론이 자리잡고 내명부 법체제가 뿌리내리면서 중기부터 간택 후궁의 위상도 변한다. 조선 초기엔 후궁의 지위에서 왕비로 승격되기도 했으나 숙종대부터 간택 후궁이 아닌 외부 간택으로 계비가 선정된다. 왕비 예비자로서 후궁의 역할이 축소되고 후사 생산자로서의 의무가 강해진 것이다.

중종~숙종대엔 후궁에 대한 승작 범위가 확대되고 왕실여성의 후원을 얻거나 국왕 측근 세력에 연계된 출신들이 늘어났다. 장녹수와 김개시 등이 정치에 깊이 관여하게 된 건 이런 배경에서다. 게다가 왕비와 후궁들의 출산율이 현격히 떨어지자 후궁의 위상이 파격적으로 높아졌다. 간택 후궁의 초직을 정1품 빈으로 하고, 비간택 후궁의 경우에도 왕자녀를 출생했을 경우 빈으로 승진이 가능해졌다.. 무수리 출신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셋째까지 낳으면서 마침내 빈으로 책봉된 것이 그 예다. 선왕의 후궁을 예우하는 제도도 생겨났다.

책은 TV사극의 자극적 소재로만 소비돼온 조선시대 후궁의 실체를 낱낱이 밝힌 공들인 작업으로 왕실사를 보다 온전하게 보여준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조선왕실의 후궁/이미선 지음/지식산업사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