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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四色] 서른 살 소녀들
엔터테인먼트| 2021-03-31 12:05

2014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휴스턴오픈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호주의 맷 존스는 바로 다음주 열리는 마스터스 토너먼트 초청장을 받는다.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급하게 결정된 출전이다. 게다가 연습라운드 때 벼락을 동반한 폭우가 내려 코스도 제대로 못 본 채 경기에 나선다. 결과는 예선 탈락. 그는 “그 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악몽 같은 한 주였다”고 돌아봤다. 한동안 잊혔던 그가 지난 22일 혼다클래식에서 7년 만에 정상에 오르며 눈물을 쏟았다. 마흔두 살의 나이에 들어 올린 우승컵이었다. “40세를 넘기면서 앞으로 5년이 정말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7년이나 걸렸지만 너무나 감사하다.”

평균 나이 30.5세의 ‘용감한 소녀들’이 있다. 10년 가까운 무명생활을 하다 극적으로 회생한 걸그룹 ‘브레이브걸스’다. 소속사 대표와 그룹 해체를 이야기하기로 한 날, 이들의 군부대 공연과 댓글모음을 담은 유튜브 영상이 업로드됐다. 3분이 조금 넘는 이 영상은 이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2017년 곡 ‘롤린’이 발표 4년 만에 각종 음원차트 1위에 오르는 역주행 릴레이가 시작된 것이다. 취업에 필요한 한국사 공부를 시작하고 카페 창업을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며 해체 이후를 준비하던 이들은 이제 쏟아지는 출연 요청과 광고 제의에 기적 같은 하루하루를 경험하고 있다. 그들은 인터뷰에서 말한다. “버티면 승리한다. 믿음을 갖고 하다 보면 때가 다를 뿐 시기는 오는 것 같다.”

일흔다섯 살의 여배우는 또 어떤가.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윤여정이다. 스스로를 전형적인 캐릭터 틀에 가두지 않는 용기와 자유로움, 예능 프로그램에서 번뜩번뜩 보여주는 위트와 여유, 탈권위적인 생각들, 감각적인 패션스타일 등으로 젊은 세대마저 사로잡는 ‘대체 불가’ 배우다. 영화 ‘미나리’ 속 순자를 향한 뉴욕타임스의 찬사가 인상적이다. 순자 대신 윤여정으로 대체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어 보인다. “순자(윤여정)는 영리한 신스틸러다. 강인하지만 친절하고, 긴 인생을 살며 축적된 현명함까지 갖추고 있다.”

은퇴 시기를 고민할 때가 된 마흔두 살의 운동선수, 해체가 당연했던 서른 살 걸그룹, 무대에서 내려와 연기인생을 차분히 정리할 나이에 다다른 일흔다섯 살의 여배우.

나이에 어울리는 말이나 행동을 ‘나잇값’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들은 분명 나잇값을 못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나잇값을 못 해준 덕분에 대중은 뜨겁게 열광한다. 가슴이 뻥 뚫리는 통쾌함을 준다.

20대에 대학을 졸업해 취업하고 결혼하고 승진하고 인생의 후반부를 부끄럽지 않게 정리하고 퇴장하는, 통상의 ‘시간표’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해방감이 있다. 그래서 지금 이 나이에 받아든 성적표에 실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안도와 기대감을 준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나잇값을 못 해 얻게 되는 ‘작은 기적들’이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샘솟을 것 같다.

10년 전 한 시상식에서 윤여정의 수상 소감은 마치 이 같은 일을 예견이라도 한 것 같다.

“난 드라마가 일종의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모두가 필요하듯 드라마 역시 주연, 조연, 단역 모두 소중하다. 때로는 주연이고 때로는 조연이고 때로는 단역일 때가 있다. 인생이란 긴 과정에서 순서처럼 다 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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