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기름 한방울 안나는 나라의 역사...원형은 살리고 새 이야기는 담고” [디자인 플러스-‘건축의 고고학’ 문화비축기지]
라이프| 2021-08-13 12:31
허서구 건축가

“원래의 장소가 가진 특수성은 건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재료예요. 한 장소는 기존의 흔적, 존재했던 기억과 이야기를 품고 있어요. 문화비축기지 역시 그 바탕 위에 지어진 겁니다.”

오랜 시간 잠들었던 ‘석유 저장고’는 지난 2017년 ‘문화비축기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문화비축기지엔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버려져, 20년간 ‘쓸모’를 잃었던 곳이 역사가 오롯이 새겨졌다.

문화비축기지를 설계한 주인공은 건축가 허서구와 건축사 사무소 RoA. 허서구 건축가는 “문화비축기지는 석유를 담는 하나의 저장소로 가진 탱크의 기능이 새롭게 문화를 담는 공간으로 치환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이 점유하던 공간을 사람이 점유하게 된다는 과정이 일반적인 건축과는 달라, 다른 공간이 생겨난 거예요. ‘다르다’는 것엔 ‘낯섦’의 의미도 담겨 있어요. 낯설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새로움’이죠.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는 것처럼, 석유저장탱크가 문화시설이 된다는 반전, 그것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이 더해진 것 같아요.”

새로운 공간은 상상력에서 출발했다. 허 건축가는 “전체 설계는 일주일 안에 나온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땅을 읽는다고 표현해요. 이곳에 숨은 이야기를 찾는 과정이죠.” ‘왜 이곳에 석유를 묻어놨을까’ 역사 속 이야기에서 상상을 발휘한 것이 설계의 시작이었다.

‘석유 파동’으로 전 세계가 급박히 돌아가던 시절,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이 나라”에서 “너무도 소중한 자원”을 꽁꽁 숨겨뒀다는 배경은 한 편의 드라마로 이어졌다. “이곳에 서울시민이 한 달간 소비할 수 있는 석유를 보관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반나절도 안돼 동이 나는 양이에요. 격세지감이 오더라고요.”

그 시절의 생각들이 소환되자, ‘원형’을 보존한 공간들이 만들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장소가 가지고 있었던 ‘다름’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원형에 대한 존중이 우선했어요. 다른 곳에선 없는 것, 찾기 힘든 것을 지키는 것이 소중한 거니까요. 요리를 할 때에도 재료가 다 파괴되면 어떤 음식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가장 훌륭한 것은 재료의 특성과 형태가 남아있는 거죠. 그 원칙을 주된 요소로 삼아 만들었어요.”

무용가 차진엽이 문화비축기지에서 선보인 ‘미인: MIIN - 바디 투 바디’ [KIMWOLF 제공]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문화비축기지로 탈바꿈한 지난 5년, 이곳에선 새로운 이야기들이 생겨나고 있다. 문화비축기지의 모든 공간은 독특한 역사성과 세련된 미학을 품어 무수히 많은 창작자를 이끈다. 공간 자체가 영감과 창의력의 원천이 된다. 무용가 차진엽은 문화비축기지를 훌륭하게 활용한 예술가로 꼽힌다. 익숙한 공연장을 벗어나 ‘장소 특정적 공연’ 트렌드를 선도해온 그는 문화비축기지에서 선보였던 ‘미인: MIIN - 바디 투 바디’로 ‘2017 춤평론가상’ 작품상을 받았다.

“초창기엔 이 공간을 이겨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때로는 장소에 짓눌리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도 잘 대응해 한결 힘 있는 공연과 전시가 된 경우도 봤어요. 지금은 제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잘 적용해, 저마다의 활용 방식을 찾아가고 있더라고요.” 원형을 보존하되, 많은 요소들이 개입할 수 있는 융통성을 열어둔 공간이라는 점은 예술가들에게 더없이 매력적이다. 그것을 통해 창의성을 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장 22개에 맞먹는 드넓은 공원을 빙 둘러 자리한 문화공간들은 하나씩 존재하면서도 ‘공통의 이야기’를 품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허 건축가는 이 공간들은 “독창이 아니라 합창”이라고 말했다.

“다섯 개의 이야기가 모여 완성된 전체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오래 전부터 존재해온 이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문화의 저변과 깊이가 확대되는 과정이에요. 제가 한 일은 그 중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 것이고요. 우리가 만든 이 작업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한시적으로 점유했다 가는 역할이에요. 미래의 누군가가 다시 고쳐서 쓰고, 거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더하면 보다 풍요로운 공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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