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조성진, “음악을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여전히 배우는 입장”
라이프| 2021-09-08 10:33
201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자 타이틀을 거머쥔 조성진이 다시 쇼팽으로 돌아왔다. 콩쿠르 이후 “동년배 연주자들에 비해 단연 주목할 커리어를 쌓아온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불렸지만 조성진은 스스로를 “성공한 피아니스트”로 부르지 않았다. 그는 “ 아직도 배워나가는 입장이고, 완성됐다고 마음을 갖는 순간부터 발전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합]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어려운 질문이네요.”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또 차분히 이야기를 전하던 조성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했다. “저는 아직, 성공했다고 정의를 내리기가 어려워요. 피아니스트로 성공이 뭐냐고 한다면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배워나가는 입장이고, 마흔 살이 되든 쉰 살이 되든 같을 거라고 생각해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고 영향력 있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우승자 타이틀은 음악가에게 ‘성공의 길’을 보장한다. 조성진의 이름이 다시 한 번 전 세계에서 주목받은 것은 2015년이었다. 그 해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조성진은 지난 5년간 “동년배 연주자들에 비해 단연 주목할 커리어를 쌓아온 세계적인 피아니스트”(허명헌 음악평론가)로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분야의 눈부신 업적을 이룬 이들에게 으레 쉬운 수사가 되듯, 조성진에게도 ‘클래식계의 BTS’, ‘클래식계의 아이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왔다. 조성진의 등장은 클래식계에 돌풍이었다. 그를 향한 팬들의 지지는 K팝스타를 뛰어넘는다.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까지 클래식을 듣게 한 장본인이었다. 영향력은 “국내를 넘어섰으며 유럽에서도 스타로 불리며 깊이 있는 행보”(장일범 음악평론가)를 이어가고 있다.

조성진은 스스로에게 ‘성공한 피아니스트’라는 타이틀을 주진 않았다. “이 정도면 완성됐다고 마음을 갖는 순간부터 발전이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이 피아니스트로 어떤 시기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유럽에서 활동한지 5년이 넘었고, 연주활동을 하는 것은 적응되고 있어요. 피아니스트로서 연주란 당연한 일로 생각해 왔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연주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됐어요. 무대를 기다리는 건 시험 공부를 하는데, 시험이 언제인지 모르는 기분이었어요. 연주할 수 있게 돼 정말 감사하고, 관객과 만나는 모든 공연이 기대가 돼요.”

국내 리사이틀을 앞두고 만난 조성진은 “피아니스트로서 연주란 당연한 일로 생각해 왔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연주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됐다”고 했다. [크레디아 제공]

▶ ‘쇼팽 콩쿠르’ 이후 다시 ‘쇼팽’=지난 7일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모처럼 들떴다. 객석의 불빛이 잦아들고, 무대로 조명이 떨어지자 관객들은 숨소리도 멈추고 조성진의 등장을 기다렸다. 코로나19로 내지르지 못하는 함성이 아쉬운듯 정장 차림의 조성진이 등장하자 객석의 박수는 떠나갈듯 터져 나왔다.

처절하고 비극적인 역사(야나체크, 피아노 소나타 Eb단조)로 시작된 연주회는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로 이어졌다. 유튜브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조성진의 ‘밤의 가스파르’는 이번 연주회에서만 들을 수 있는 곡이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밤의 가스파르’에 대해 물의 생생한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극한의 테크닉을 보여주면서도 라벨의 상상력을 펼쳐내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다. 조성진 역시 “지금까지 연주한 피아노 솔로곡 중 테크닉적으로 가장 어려운 곡”이라고 했지만, 무수히 쏟아지는 32분 음표들은 비누방울처럼 유연하게 흘러 ‘물의 요정’(온딘)이 잠시 들른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연주회의 백미는 쇼팽의 ‘스케르초’. 쇼팽 콩쿠르에서의 우승 이후 그는 자신의 성과 쇼팽을 딴 ‘초(CHO)팽’으로 불렸다. 그만큼 조성진에게 쇼팽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이어진 ‘스케르초’ 4곡에서 조성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넸다. 그의 깊은 내면의 이야기는 이지러짐 없이 건반 위에 풀어졌다. 서정적이면서도 객석을 긴장하게 만드는 폭발하는 감정이 정확히 건반 위로 날아들었다.

이번 연주회는 쇼팽 콩쿠르 이후 다시 선보인 쇼팽 음반 발매와 맞물려 열렸다. 새 음반에는 쇼팽 스케르초 4곡 전곡과 쇼팽 피아노협주곡 2번이 실렸다.

국내 리사이틀(11일 여수·12일 경기·16일 부산·18일 서울)을 앞두고 만난 조성진은 “쇼팽을 녹음하기로 결정한 것에 많은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2016년 녹음 이후 의식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성진은 2016년 11월 쇼팽의 발라드와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녹음한 앨범을 냈다. 당시 앨범에서 1번을 함께 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이번 음반의 협주곡 2번 녹음을 함께 했다.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로서 쇼팽이 남긴 협주곡 2개를 완성한 셈이다.

“콩쿠르 우승자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커리어를 잘 쌓을 수 있어 많은 사람이 탐내는 자리이지만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각인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드뷔시, 모차르트, 슈베르트, 리스트 등 다른 작곡가를 녹음해오다 5년이면 충분한 시간이 됐다고 직감적으로 느꼈어요.”

쇼팽 앨범의 녹음을 처음 계획한 것은 2018년이다.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지난해 완성됐겠지만, 코로나19로 영국의 음악실이 문을 닫으며 올해 3~4월 나눠 녹음하게 됐다. 앨범에 담긴 스케르초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그는 “5년 전 쇼팽 발라드 전곡을 녹음했기 때문에 이번엔 스케르초 전곡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음악도 추억과 메모리가 중요해요. 스케르초는 제게 특히나 추억이 많은 곡이에요.” 조성진이 스케르초를 처음 연주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스케르초 2번은 2006년 지휘자 정명훈 선생님 앞에서 연주해 정 선생님과 인연이 만들어졌고, 은사인 신수정 선생님과의 인연도 이 곡과 함께였어요. 쇼팽콩쿠르 당시 준결선 마지막 곡으로 연주하기도 했고요.” 이런 이유에서 스케르초는 조성진의 음악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연주한 곡으로 꼽힌다.

2016년 11월 쇼팽의 발라드와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녹음한 앨범 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앨범에서 조성진은 스케르초와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담았다.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로서 쇼팽이 남긴 협주곡 2개를 완성한 셈이다.[유니버설뮤직 제공]

▶ “음악을 직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젊은 거장의 길=5년이 지나 음반으로 선보이는 쇼팽에선 한층 깊어지고 달라진 조성진의 연주를 만날 수 있다. 그는 “2015년 쇼팽콩쿠르를 당시엔 연주 스타일이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쇼팽 콩쿠르 땐 경연이라는 상황으로 인해 경직된 느낌이 있었을 것 같아요. 콩쿠르 이후엔 자유롭게 음악을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다른지는 모르겠어요. 연주하면서 일부러 다르게 한 적은 없으니까요. 거울을 보면 제 얼굴은 똑같아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이를 먹었다 하는 것과 같아요.(웃음) 사실 쇼팽 콩쿠르는 많은 기회를 줬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나 긴장되고 끔찍해요.”

조성진은 이번 음반에 담긴 협주곡 2번에 대해 “쇼팽이 쓴 곡 중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쇼팽 콩쿠르 파이널 때 쇼팽 협주곡 1번을 연주했던 것은 그때까지 2번을 연주해보지 않아 1번이 더 안전했기 때문이에요. 1번이 더 널리 연주되는 것은 길이가 8~10분 정도로 더 길고, 보여줄 수 있는 테크닉이나 음악적 요소가 더 많기 때문이죠. 반면에 2번은 섬세한 요소가 더 많고 구조도 더 자유로워요.”

“녹음보다 무대를 선호한다”는 조성진은 음반을 녹음할 때도 라이브 콘서트처럼 진행한다. “관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솔로곡을 녹음할 때 꼭 하는 것이 있어요. 녹음을 마친 뒤엔 프로듀서와 관계자들을 앉혀놓고 콘서트처럼 연주를 해요.” 음반이 세상으로 나오기 전 가장 첫 번째 관객인 셈이다. 라이브처럼 연주한 음반에 실리는 버전은 숙고를 거듭한다. 5년 전의 쇼팽 앨범에선 수많은 테이크를 녹음하고, 가장 마지막 버전을 실었지만 이번엔 2~3번째 테이크가 음반에 실렸다고 한다.

쇼팽 콩쿠르 이후 2016년 1월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계약을 맺은 그는 매해 새로운 연주음반을 냈다. 짧은 시간 안에 차근차근 한 계단씩 밟으며 놀랍도록 탄탄한 커리어를 쌓았다. “전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건강하지 않은 생각일 수 있지만, 내일 고민은 내일 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요.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내일 할 일은 내일 하는 거죠.” 오늘의 최선은 조성진의 지금을 보여준다. 세계 곳곳의 공연장을 누빈 그는 지난 6년 사이 반짝이는 샛별에서 ‘젊은 거장’의 반열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베를린필 협엽, 카네기홀 리사이틀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꿈은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전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음악을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좋은 연주를 많이 하는 것이 제게 더 많은 행복을 주고 있어요.”

2015년 콩쿠르 이후 많은 음악적 변화와 성장을 보여준 조성진에 대해 평론가들은 “답보된 상태의 음악이 아닌 발전하는 음악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미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음악가”라고 말한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 피아니스트 조성진은?…“답보하지 않고, 자신의 어법을 찾아가는 음악가”

조성진(27)은 6세 때 피아노를 시작, 11세에 첫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보인 것은 2009년 일본 하마마츠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대회 최연소로 우승하면서다. 열일곱 살이 된 2011년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에서 피아니스트 미셸 베로프와 함께 공부했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의 멘토링을 받은 기간이다. 2015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하며 세계가 사랑한 피아니스트가 됐다.

2016년 도이치 그라마모폰에서 선보인 첫 쇼팽 앨범은 당시 ‘그 어떤 것도 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 음악이었다’(가디언), ‘시작이고 사색적이며 우아한 그 모든 것’(파이낸셜 타임즈)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콩쿠르 이후 지난 5년간 조성진은 많은 음악적 변화를 보여왔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쇼팽 콩쿠르 이후 짧은 5년 동안 쇼팽, 드뷔시, 모차르트 등 매회 새로운 음반을 선보이며 조성진은 자기만의 음악을 찾으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며 “답보된 상태의 음악이 아닌 발전하는 음악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미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선보인 쇼팽 음반에 대한 평가도 다채롭다. 지금의 조성진은 “새로움을 많이 시도”(허명현 음악평론가)하면서도 “지적이고 깊이가 더해진 앨범”(장일범 음악평론가)을 선보였다는 평가다.

허명현 평론가는 “훌륭한 연주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프레이징, 세부적인 디테일, 텍스추어를 다루는 방식 모두 훌륭하다. 다양한 콘텐츠를 음악에 집어 넣었고, 연출을 시도했다”며 “하지만 음악에 담긴 콘텐츠가 많다는 것은 편하게 듣고 싶은 청자들에겐 부담스럽게 들릴때도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즉흥곡 같은 장르에서는 음악보다 연출이 먼저 보이고, 음악이 끊어진다는 인상도 받게 된다”고 말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콩쿠르와 달리 새 음반의 쇼팽은 훨씬 자유로워져 본인의 색깔을 많이 넣었고, 자신만의 어법을 찾아가고 있는 음반이라는 점이다”라고 강조했다. 장일범 음악평론가는 “하나하나 허투루 보내는 것 없이 모든 음을 의미있게 친 음반”이라고 했다.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조성진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협연자로 꼽히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파리 오케스트라 등 세계 유수 악단과 협연했고 카네기홀, 베를린필하모닉 실내악홀 등 세계 유수 공연장에 섰다. 2023년 6월까지 연주 일정이 빼곡하다. 가까이로는 내년 3월 마티아스 괴르네와의 미국 투어가 예정돼 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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