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최영미 시인의 심플라이프]'ㅇㄱㄹㅇ'…언어의 타락?
라이프| 2022-05-10 11:07

“부모 찬스, 입시용 기부 스펙 쌓기, 셀프 기사 작성 등 허위 스펙 풀코스를 거친 것 같다” “검수완박과 같은 대형 이슈에 묻혀…”.

어느 날 대한민국의 신문과 방송에 등장한 기사를 보며 눈이 피곤하였다. 눈만 아니라 자존심도 상하였다. ‘찬스’가 무슨 뜻인지는 나도 안다. ‘스펙’과 ‘검수완박’이 무슨 뜻인지 지금은 알지만 한두 해 전에 인터넷 검색창에 ‘스펙과 ‘검수완박’을 친 적이 있다. 문단 안팎에서 ‘모던 걸’로 통하는 내가 이럴진대, 우리 할머니가 살아서 텔레비전을 보신다면 “저게 뭔 말이냐?”고 내게 물으실지도 모른다.

“당신을 인싸로 만들어 줄 패션템.” 인싸? 내가 모르는 단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인싸’에 환호하는 젊은 세대에 이질감을 느끼는 나.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 지하철 광고판에 버젓이 등장한 ‘득템’ ‘지름신’에 분노하지 않았나. 나의 시집 ‘공항철도’를 읽고 누군가 인터넷 서점에 남긴 서평에 등장한 ‘ㅇㄱㄹㅇ’이 무슨 뜻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아 결국 네이버에 들어가 세종대왕이 만드신 위대한 한글의 초성 네 자를 검색하고 나는 웃었다. “이거 리얼(real)”! 한글과 영어의 생뚱맞은 조합이나 내 시를 칭찬하는 말이라니, 왜 이리 귀여운지. 아~간사한 인간이여.

손전화의 전원을 켜고 ‘득템’을 검색하고 노안이 와서 침침해진 눈을 비비며, 내 눈을 더 침침하게 만드는 국적 불명의 신조어를 퍼뜨리는 이들에 대해 분노를 넘어… 내가 그들을 경멸할 자격은 없다. 사회의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해 허둥지둥 뒤에서 한탄하며 서운함을 삼키는 할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지금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려고 한다.

상점에 가면 흔히 듣는 “바코드를 스캔해주세요”에 불편함을 인지하지 못한 내가 왜 ‘득템’과 ‘스펙’에 분노하나. 외래어는 나도 쓴다. 어제 페이스북에 새 글을 올리며 “5월에 스케줄이 몇 개 잡혔어요”라고 쓰고 난 뒤에 뒤가 캥겨서 ‘스케줄’을 우리말로 바꾸려다 관두었다. ‘계획’이나 ‘행사’로 바꾸려니 너무 거창한 느낌이 들었다. ‘스케줄(schedule)’처럼 뿌리가 분명한 외래어, 한글로 표기된 단어를 그대로 발음하여도 원어의 뜻을 왜곡시키지 않는 외래어는 써도 괜찮지 않을까. 한글로 대체가 불가능한 ‘페이스북’을 ‘얼굴 공책’이라고 굳이 한글로 풀어서 표기하는 것도 어색하다.

문제는 한글과 외래어 혹은 한자와 외래어의 조합이다. ‘득템(得item)’처럼 한자와 외래어를 마치 한 단어처럼 붙여 쓰는 경우, 처음 듣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다. 북한 이탈 주민이나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한글과 외래어가 섞인 표현이라고 한다. ‘퓨전 푸드’에는 거부감이 없는데 왜 ‘퓨전 표현’에는 거부감을 느낄까. 사실 나는 퓨전 푸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떡을 넣거나 불고기를 넣은 샌드위치를 호기심에 한두 번 맛본 적은 있으나 내 돈 내고 다시 사 먹고 싶지 않다.

“리키 파울러가 134야드 거리에서 시도한 샷을 그대로 홀 안에 넣었지만 결과는 보기인 장면을 연출하였다.” 물론 ‘샷’이나 ‘보기’가 골프 용어라는 건 나도 알지만 ‘보기’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내 생활과 아무 관계가 없는 말이기에…. 어떤 외래어는 낯섦을 넘어 계급 의식을 드러내 나를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시인·이미출판 대표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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