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20년전 악몽이 살아나...제2의 뿌리 잘라내는 고통없길”
뉴스종합| 2022-11-24 11:23

오는 25일부터 내달 1일까지는 세계 여성폭력 추방주간이다. 친족성폭력은 여성폭력 중에서도 사각지대로 꼽힌다. 가족 내 범죄로 지속·반복되지만 은폐 또한 쉬워서다. 지난해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 통계에 따르면 친족성폭력 피해상담자 10명 중 8명이 19세 이전에 피해를 겪는다 .

24일 헤럴드경제는 8살부터 10년 넘게 벌어진 친족성폭력의 생존자인 50대 여성 푸른나비(필명)를 만났다. 그는 책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잘 사는 세상을 원해’의 집필작가 중 한 명이다. 푸른나비는 40대 후반이 돼서야 지난 기억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본지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전면 폐지와 피해자의 ‘아플 시간’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푸른나비와의 일문일답.

-한국성폭력상담소 통계에 따르면 친족성폭력 피해자 2명 중 1명은 첫 상담을 받기까지 10년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생존자로서 피해를 말하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

▶가정폭력을 피해 원가족과 온전히 분리되면서 이전의 기억을 돌아보게 됐다. 상담 받으면서 내가 겪은 일이 범죄란 걸 깨닫게 됐다. 친족성폭력 경험을 외부에 말할 수 있게 된 건 40대 후반이었던 2015년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자조 모임을 가게 되면서다. 나랑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너무 궁금했다. 20~30대 때는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명확하게 인지를 못했다. 살면서 기억이 올라오면 컵을 못 들거나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해리성 기억상실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기억이 남 일처럼, 스쳐 지나가는 환상처럼 느껴졌고 그게 이상한 증세인지 모르고 살았다. 억압된 상태에서의 망각이었던 거다.

-10년 넘게 범죄가 벌어졌다. 어떻게 멈추게 됐나.

▶고3 때는 엄마가 가해자인 아버지를 향해 ‘대학 가야 하니 (딸을) 놔둬라’ 했던 기억이 있다. 성인이 돼서도 범죄가 벌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 집을 나와 혼자 살았다. 홀로 살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공소시효가 끝났기 때문이다. 13세 이상 대상 친족성폭력 공소시효는 최장 10년(단, DNA 등 과학적 증거가 있으면 10년 연장 가능)이다. 14살에 범죄를 겪은 아이가 DNA 증거를 챙겨놓고 20대 성인이 됐다고 바로 신고를 할 수 있을까.

피해자라고 인정하면 뿌리를 잘라내는 고통이 있다. 다리를 잘라내는 것처럼, 밟고 선 땅이 무너지는 느낌 말이다. 피해를 인정하는 일이 무서웠다. 가족이란 끈이 떨어져나가는 일인데 감내하고 잊으라는 얘길 들었다. 여동생은 ‘반항하지 않아서’, 친척은 ‘전생에 내가 죄를 지어서’라고 피해를 당하게 된 거라고 말했다. 가정이란 울타리에서 신고하면 가족의 내부고발자가 되는 거였다.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뿐 아니라 나머지 가족과 평생 연결돼 있다. 50대가 된 지금도 가족 중 제가 겪은 일을 아직도 모르는 동생도 있다. 그래서 익명 인터뷰를 할 수밖에 없다.

-가해자인 아버지에 대한 용서를 강요한 엄마도 가해자라고 서술했는데?

▶엄마는 범죄 사실을 알고도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으라’고 했다. 엄마도 딸을 기절시킬 만큼 나를 학대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엄마란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부모와 완전히 분리되고 나서야 엄마의 방조가 범죄를 오히려 조장했다는 걸 알게 됐다.

-푸른나비는 공소시효 전면 폐지를 계속 주장해 왔다. 왜 꼭 필요한가.

▶가족이란 관계는 시효가 평생이다. 피해자가 저처럼 독립한 이후, 신고를 결심하거나 증거를 찾기 시작할 힘이 생겼을 때 언제든 고소할 수 있는 게 최소한의 안전망이라고 생각한다.

-범죄로 겪은 피해 극복을 위해 받은 상담 외 지원은.

▶없다. 40대 후반 기억이 되돌아왔을 때 평소처럼 일할 수 없었다. 신체화 증상이 심해져 10년 넘게 해 온 일을 멈춰야 했다. 경제적인 안정과 ‘아플 수 있는 시간’이 정말 필요했다. 아동·청소년이라면 더욱 대체가족이나 당장 쉴 곳이 있어야 한다. 이들은 쉼터를 나오고 나서의 자립까지도 스스로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친족성폭력 피해를 인지하거나 목격한 사람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일단 피해자의 말을 처음 들어줄 사람, 가족과 분리될 수 있는 물리적인 지원이 중요하다. 안내도 필요하다. 친족성폭력에 대한 인식부터 성폭력상담소를 알려준다거나 생존자들이 쓴 책을 넌지시 건네주는 일 말이다. 피해를 축소하는 표현도 멈춰야 한다. ‘이뻐해서 그런 거다’, ‘너를 건드렸다’는 표현은 지금도 싫어하는 말이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12시 서울 광화문 칭경비 앞에서 공소시효 폐지 시위를 한다. 지속·반복·은폐되는 친족성폭력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론화할 것이다.

김희량 기자

hop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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