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라이프 칼럼] 초당두부
라이프| 2023-03-16 11:27

비가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따끈한 음식을 찾아 강릉 초당마을로 갔다.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로 강릉을 찾는다. 젊은 부부는 아이 손을 잡고 율곡 생가를 찾는다. 중장년은 커피거리를 찾는다. 청년은 강릉 해변을 가득 메운다. 식사시간이 되면 모두 초당마을로 간다. 그래서 지금은 초당마을이 아니라 초당두부마을이다.

초당두부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이름 때문인지 초당 허엽과 연결 짓는 이가 많다. 허엽의 아들 허균은 자신이 쓴 글을 묶어서 ‘惺所覆 藁(성소부부고)’라 이름 붙였다. ‘성소’는 허균을 지칭하는 호다. ‘부부고’는 뚜껑 대신 단지를 덮는 용도로 사용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요즘 말로 하면 라면 냄비받침으로 사용하는 책쯤 된다. 허균답지 않은 겸손한 표현이다.

이 문집에 ‘屠門大嚼(도문대작)’이라는 글이 있다( ‘성소부부고 Ⅲ’ 228~236쪽). 푸줏간을 지나면서 침을 삼킨다는 뜻이다. 음식 이야기다. 떡·과실·수산물·채소·고기·차 등으로 나눠서 적었다. 찹쌀떡이나 감떡보다 훨씬 나은 금강산 떡,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드는 의주 만두, 곶감으로 만들어 먹으면 더욱 좋은 지리산 먹감, 부안 사슴꼬리, 중국 사람들이 동해부인(東海夫人)이라 부르는 우리나라 연안 홍합, 중국 사람들이 우리한테 배워가서 고려반(高麗飯)이라 부르는 경주 약밥 등 음식 이야기가 끝도 없다.

당연 두부 이야기도 한다. 장의문 밖 사람들이 잘 만든다. 말할 수 없이 연하다. 한양 북소문 창의문 아래에 안동 김씨들이 살았다. 동네가 장동이었기에 장동 김씨라 불렀다. 그래서 창의문도 장의문이라 부르기도 했다. 창의문 밖 동네가 요즘은 치킨으로 유명한데 그때는 두부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초당두부 이야기는 없다. 초당두부가 아버지로부터 비롯됐다면 자랑하지 않았을 리 없다. 초당두부와 초당 허엽은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인다.

광복을 맞으면서 초당마을에 회오리가 몰아친다. 강릉은 좌익활동이 왕성한 곳이었다. 1930년대 적색농민조합 지도자들이 광복과 함께 활동을 재개한다. 1946년 가을 강릉에서는 농민이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1947년 7월 24일 우익 건청이 초당마을로 쳐들어간다. 초당마을 사람들은 하나로 뭉쳐서 물리친다. 주문진에서 검은 옷을 입고 강릉으로 넘어 온 우익청년단까지 합세한다. 강릉시내에서 2차 충돌이 벌어진다. 우익이 도발하고, 초당마을 사람들이 맞서면서, 1000명 넘는 일대격전으로 커진다. ‘초당리 7·24 사건’이라 부른다( ‘강릉시사 江陵市史 下’ 146~151쪽).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초당마을 사람들은 많은 고초와 희생을 겪는다. 할 수 없이 월북을 선택한 사람이 많았다. 전쟁을 멈춘다. 남은 주민은 생계가 막막하다. 순두부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팔았다. 소금 살 돈도 없었을까? 바닷물을 간수로 쓴다. 그 덕분에 몽글몽글한 초당두부가 탄생한다.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깊고 고소한 맛이 난다.

초당두부마을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짬순이’가 몰고 온 바람이다. 바닷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싱싱한 해산물로 진한 짬뽕국물을 우렸다. 짬뽕국물을 초당순두부와 합쳤으니 짬뽕순두부, 곧 짬순이다. 만화가 허영만이 만화 ‘식객’과 텔레비전 프로그램 ‘백반기행’에 소개하면서 순식간에 맛집이 됐다. 오늘은 초당두부마을에서 따끈한 짬뽕순두부를 먹었다. 초당두부마을에서 불어 올 또 다른 새 바람을 기대한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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