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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회화의 본질, 동서양 두 작가가 말하다
라이프| 2023-05-22 12:16
토마스 샤이비츠, Jennifer in Paradise, 2023, 캔버스에 유채, 비닐 페인트, 피그먼트 마커, 120x280cm [학고재 제공]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짧게 잡으면 수 백년 길게 잡으면 2000년. 긴 시간 동안 인류는 이미지와 씨름해 왔다. 평면에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온갖 이론과 방식이 개발됐다. 원근법과 큐비즘, 극사실주의 등 회화사의 발전은 인간 인식의 변화이기도 하다.

서울 종로구 학고재는 박영하(69)와 토마스 샤이비츠(55), 동서양 작가 2인의 개인전을 나란히 개최한다. 표현방식도, 철학도, 대상도 모두 다르지만 두 작가 모두 ‘회화의 본질’을 파고든다. 형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박영하, 내일의 너, 2023,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163x131cm [학고재 제공]
박영하, 내일의 너

박영하 작업의 제목은 모두 ‘내일의 너’다. ‘해야 솟아라’로 시작하는 시 ‘해’로 유명한 시인 박두진(1916-1998)은 장남인 작가에게 ‘내일의 너’라는 회두를 던지고 떠났다. 영원히 새롭게 작업하라는 의미가 담겨있지만 작가는 “예술가는 일반인보다 한 발 앞서야한다는 점에서, 내일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존재로서 회화의 본질을 고민하기 위해 이 화두를 그림으로 옮긴다”고 해석한다. 또한 작품과 마주할 때, 제목에 함몰되기보다 무한한 생각을 펼쳐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은 추상이다. 그러나 특정한 대상을 단순화한 구현도, 개인의 심상을 표현한 것도 아니다. 작가가 직접 개발한 안료로 캔버스에 거듭 쌓아올리다 ‘스스로 만들어진(자연·自然)’ 형상들이다. 작가는 “돌일 수도 나뭇가지일 수도 있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흔적들일 뿐”이라고 말한다. 작업실 바닥에 10여점 캔버스를 눕혀놓고 물감을 덧칠하고 질감을 만들며 쌓아가다 보면 3~4개는 차분한 무채색을 띈다. “추상의 매력은 그릴수록 끝이 없다는 점이다. 붓을 놓을 때도 완성의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너무나 흥미롭다”

박영하, 내일의 너, 2023, 캔버스 위에 혼합재료, 26x18cm [학고재 제공]
박영하 작가 [이한빛 기자]
토마스 샤이비츠, 제니퍼 인 파라다이스

독일 작가 토마스 샤이비츠는 르네상스, 바로크, 근대명화를 비롯 동시대 만화, 광고, 인터넷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추출하고 변형해 이를 캔버스에 옮긴다. 이 과정에서 그는 포토샵의 작업방식을 활용한다. 기존 합성이 콜라주, 리터칭, 이중노출 혹은 다중노출에 국한했다면 포토샵 이후의 사진은 직접적 이미지 변형에 맥락과 상관없는 이미지의 조합이 가능해졌다. 작가는 이같은 포토샵의 기능이 21세기 동시대 회화의 가장 큰 차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작업에 꾸준히 응용하고 있다. 형광색도 20세기와 다른 동시대의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 쓴다.

토마스 샤이비츠, Epic Games, 2022,캔버스에 유채, 비닐 페인트, 피그먼트 마커, 160x280cm [학고재 제공]

전시 제목이자 작품명인 ‘제니퍼 인 파라다이스’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포토샵 개발자인 토마스 놀은 1987년 보라보라섬으로 떠난 여행에서 여자친구였던 제니퍼의 사진을 찍어 세계 최초로 합성사진을 제작한다. 샤이비츠의 작업 어디에도 제니퍼를 짐작할만한 이미지는 없다. 작가는 “이 시대의 회화는 추상이나 재현을 초월해야한다”고 말한다.

토마스 놀이 제니퍼의 이미지를 잘라내고 복사해 수없이 붙여넣으며 ‘합성’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만들었던 것 처럼, 샤이비츠는 형광 연두색과 주황색 그리고 이와 대조를 이루는 무채색을 활용해 기묘한 동시대성을 표현한다. 비정형의 형광 도형들 사이 관객은 무엇을 보아야 할까. “우리 삶이 기하학 도형처럼 반듯한가? 그림속 도형들이 구불구불한 건 우리 세상도 구부러졌기 때문이다” 회화가 인간 인식의 반영이라면,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그 안에 비친 동시대다. 두 전시 모두 6월 17일까지.

토마스 샤이비츠 작가 [이한빛 기자]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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