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핏빛 정육점에서 벌어지는 잔혹극 ‘맥베스’ [인터뷰]  
라이프| 2024-06-14 14:05
수어와 판소리가 만난 연극 '맥베스' [국립극장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그야말로 ‘격정 누아르’다. 격렬한 투쟁 같기도, 욕망의 고백 같기도 한 ‘손의 언어’에 운율을 실은 소리들이 담담하게 스민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죽음의 행진곡’이 그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시공간이 완전히 뒤틀렸다. ‘왕이 된다’는 ‘마녀의 예언’에 최고 권력자를 욕망하다 파멸해가는 장군 맥베스의 이야기가 서울의 정육점으로 무대를 옮겼다. 동명의 원작을 재해석한 신작 연극 ‘맥베스’(16일까지, 국립극장)다.

‘맥베스’의 접근 방식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현대화, 한국화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수어와 판소리가 만나 ‘고전’을 재해석했고, 남성 중심 이야기를 여성 배우들이 연기한다. 서양의 이야기에 한국적 선율도 입혔다.

수어와 판소리가 만난 연극 '맥베스'에 출연하는 농인 배우 박지영, 음악감독 이향하, 소리꾼 이승희(왼쪽부터) [국립극장 제공]
무대 위 ‘끝나지 않는 장례식’…“피비린내 속 잔혹함 그려”

“페어플레이는 반칙이고, 반칙은 페어플레이다.”

백색 타일로 이뤄진 차갑고 비정한 무대. 이곳은 서울의 한 정육점. 매일 ‘살인이 일어나는 공간’, 이 곳에선 장례식이 끝나지 않는다. 매일의 살인이 매일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매일의 ’머릿고기‘가 걸린다. 사람들의 손에선 붉은 핏기가 가시지 않는다.

징글징글한 욕망과 집착의 끝을 보여주는 원작 속 주인공의 상황은 대대로 이어온 ‘정유점 가문’의 유산 쟁탈전으로 치환됐다. 원작 속 끝도 없는 살인에서 착안, 오늘날 현대에서 칼을 가장 많이 다루는 곳으로 정육점을 설정하고 이 안에서 정의, 관계, 규범이 모호해지는 현대인의 잔혹함을 그렸다는 게 제작진의 설명이다. 연극은 원작 속 16개의 독백 장면을 선별, 16개 장면으로 구성했다.

시공간이 달라진 만큼 등장인물도 달라졌다. 남성 배우 중심이었던 극은 모두 여성 배우로 치환됐다. 주인공 맥베스 격인 막 역은 배우 박지영이 맡았다. 2022년 백상예술대상에선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 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으로 여자 연기상 후보에 오른 배우다.

그는 “이렇게 무겁고 진지하고 느린 속도의 작품의 공간을 정육점으로 바꾼다니 깜짝 놀라고 의문이 들었다”며 “뻔한 흐름을 벗어나 겉으론 차분하고 조용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미쳐있는 사람의 욕망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청인들에게 마냥 따뜻하고 아름다운 언어처럼 느껴진 수어를 ‘차갑고 잔혹한 언어’로 써내가려 간 작품이기도 하다. 박지영은 “실제로 농인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에선 예쁜 대사만 많은데 잔인한 단어도 많다”며 “농인의 욕이 청인에게 와닿진 않겠지만, 분위기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물론 모두에게 통하는 ‘손가락 욕’도 등장한다.

소리꾼에게도 달라진 맥베스는 낯선 작품이었다. 이승희는 “‘맥베스’를 상상하면 고전에서 주는 음악적 웅장함과 암울함이 떠오르는데 오히려 빠르고 독특하며 코믹한 부분이 많아 색다른 음악색이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서양 고전이지만 서도민요, 진도 씻김굿, 심청가 상여소리, 흥타령 등 전통 소리를 다양하게 들을 수 있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수어와 판소리가 만난 연극 '맥베스' [국립극장 제공]
주인공이 된 농인 배우,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소리꾼

손은 춤을 추고, 그들의 언어는 음악이 된다. 무대 위엔 세 개의 언어가 공존한다. 한국어, 한국 수어, 소리꾼의 소리. 여섯 명의 주인공은 모두 농인 배우다. 이들과 함께 네 명의 소리꾼(김소희·김율희·이승희·추다혜)이 호흡을 맞춘다.

‘맥베스’는 국립극장이 해마다 한 편씩 기획하고 있는 무장애 공연이다.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를 뇌성마비 고등학생 이야기로 치환한 ‘틴에이지 딕’(2022), 농인 배우들과 청인 배우가 어우러진 ‘우리 읍내’(2023) 등으로 무대 안팎의 장애를 허물고 있다.

기존 국립극장의 무장애 공연이 장애 배우와 비장애 배우, 스태프가 어우러진 작품이었다면, 이번 ‘맥베스’는 한 단계 더 진화했다. 기존 작품을 뒤바꿨고, 배우는 말이 없다. 배우는 소리꾼들의 소리를 듣는 대신 무대 위에 설치된 LED바를 통해 시작과 끝을 확인하고 그 사이에 수어 대사를 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손의 언어는 농인 관객에겐 대사이나, 청인 관객에겐 연기이자 안무처럼 전달된다. 청인 관객 입장에선 이들 언어의 해설자 격이 바로 소리꾼이다. 두 언어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나, 둘 사이의 호흡은 중요한 부분이다.

음악감독을 맡은 이향하(판소리 단체 입과손스튜디오 대표)는 “LED 시스템이 없어도 배우와 소리꾼들의 호흡이 딱딱 맞아떨이지는 순간이 연습을 진행할수록 많이 포착돼 신기한 경험을 해나가고 있다”고 했다.

작품이 재탄생하는 과정이 지난했다. 이 음악감독은 “원작을 각색한 뒤 수어 번역을 거치고, 이 과정에서 음악 워크숍을 수차례 가지며 배우와 소리꾼의 리듬을 맞춰갔다“며 “소리꾼들의 입에 맞도록 작창(소리를 짓는 일) 작업도 진행했다”고 말했다. 연극에선 원작 주인공 맥베스(막 역)와 레이디 맥베스(리 역)를 중심으로 뽑은 주요 독백 16개를 수어로 표현할 때 적절한 동작이 나올 수 있도록 각색했고, 여기에 ‘판소리적 어법’을 더했다.

수어 번역은 농인 배우들이 도맡았다. 박지영은 “‘인생은 움직이는 그림자’는 이 작품의 유명한 독백인데 있는 그대로 수어로 표현할 때 셰익스피어의 독특한 느낌과 문화적 맥락이 받아들여질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리(레이디 맥베스)의 대사는 수어로 시를 표현한 대사가 많다. 박지영은 “리의 연기에서 시각적 언어를 표현한 부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수어와 판소리가 만난 연극 '맥베스'의 소리꾼 이승희, 배우 박지영, 음악감독 이향하 [국립극장 제공]

작창을 할 때도 기존의 순서와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됐다. 이승희는 “본래 말 맛을 살리는 것을 최우선을 하고 장단을 정하는데 이번엔 배우의 수어 속도에 맞춰 장단을 먼저 정하고 그 안에 말을 집어넣는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소리꾼들은 본래 솔리스트 기질이 타고난 사람들이나 이 무대에선 배경처럼 스민다. 무대 위 소리꾼들의 자리 역시 가장자리다. 이승희는 “소리꾼은 중간에 치고 들어가기도 하고, 몸과 손도 많이 쓰는데 이번엔 수어에 방해가 될 수 있어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며 “성량과 표현법에서도 말하듯이 담담한 소리를 해야 해서 적절한 소리를 찾는 과정이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이 감독은 “센터 본능이 내재된 네 명의 소리꾼이 자신을 억누르는 것이 굉장히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이라며 “네 소리꾼은 한 명이면서 음악과 한 몸이 되고, 코러스로 어우러져야 하는 도전적인 과제도 안고 있다”고 했다. 흥겨운 민요가 나올 때는 다들 몸을 움직이고 싶어 온몸이 간질간질한 상태다.

음악은 수어에서 영감을 받아 태어났다. 이 감독은 “농인의 수어는 하나의 단어를 상황에 따라 얼굴의 표정, 기운을 더해 이야기하며 시청각적 효과를 주는 것이 굉장히 입체적이라고 느꼈다”며 “농인 배우들이 소리꾼이라는 생각으로 수어의 리듬을 음악에 담아내는 것을 중점에 뒀다”고 말했다. 복잡한 화성, 화려한 멜로디는 촤대한 지양하고 리듬 중심의 음악을 만들어간 것도 소리꾼처럼 보여질 농인 배우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무대 위 언어가 달라지면 연극은 새로운 콘텐츠가 된다. 이승희는 “이 작품은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판소리, 어떤 사람들은 연극, 어떤 사람들은 음악극으로 볼 수 있다”며 “그 모든 장르를 내려놓은 하나의 어울림으로 느끼면 좋겠다”고 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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