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피해자는 수천·수만인데…솜방망이 처벌 왜일까[개미 울리는 무자본M&A]
뉴스종합| 2024-06-28 10:01
대한민국 자본시장에서 무자본 인수합병(M&A)을 악용한 불공정거래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헤럴드경제DB]

[헤럴드경제=이용경 기자] 대한민국 자본시장에서 무자본 인수합병(M&A)을 악용한 불공정거래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무자본 M&A는 인수할 회사의 자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그 자체로는 합법이다. 다만 일부 자본시장 내 검은 세력들은 이를 악용해 주가조작, 사기·횡령·배임 등의 범죄를 일삼고 있다. 특히 자본시장의 신뢰성을 훼손하고 선의의 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초래하는데도 죄질에 비해 낮은 처벌 수위 탓에 쉽사리 근절되지 않고 있다.

소액주주들의 피해를 양산하고 있는 무자본M&A는 전통적인 LBO(차입매수, Leveraged Buy Out)와는 차이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기존 LBO가 기업 인수자의 파이낸싱을 위해 회사의 자산을 담보로 제공하는 형태였다면, 최근에는 시총이 작은 상장사들을 타깃으로 주식 양수인이 주식 자체를 담보로 제공하면서 인수금융으로서 적법한 외양을 갖추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무자본M&A 이후 발생하는 주가조작 범죄다. 당초 허위 정보로 주가를 띄워 이득을 보던 주가조작 세력은 이제 무자본M&A를 활용해 전격적으로 경영권 인수를 시도하는 세력으로 진화했다.

LBO의 일종인 이른바 무자본M&A를 통한 불공정거래 행위가 국내 자본시장에서 여전히 만연한 주된 이유는 낮은 처벌 수위다. 무자본M&A 그 자체로는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주가조작 세력이 이를 악용한 범죄를 범해도 검찰이 혐의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자본시장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주가조작 일당에 대한 법원의 선고 형량이 낮은 경우도 부지기수다.

대법원 최신 판례를 보면, 우선 주가조작 범죄자가 세력과의 공모를 통해 수백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해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이 선고되는 데 그친 경우가 상당수다. 대법원은 지난해 7월 자본시장법 위반, 특정경제범죄법상 횡령 등 혐의로 기소된 자동차 부품회사 에스모의 전직 대표 김모 씨에게 징역 5년에 벌금 3억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씨는 에스모의 실소유주이자 기업사냥꾼으로 알려진 이인광 회장 등과 공모해 2017년 8월부터 2018년 3월까지 무자본M&A 방식으로 회사를 인수하고, 허위공시와 함께 주가 부양용 보도자료 를 배포해 주가를 끌어올린 다음 이를 근거로 전환사채(CB)를 매도해 방식으로 577억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았다.

또 김씨는 에스모 자금 65억원과 시가 197억원 상당의 에스모 주식 269만2000주를 이 회장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혐의(횡령)도 받았다. 특히 김씨가 에스모를 인수하는 과정에는 라임펀드 자금이 투입된 것으로도 알려졌다.

다만 앞서 이 사건 1심은 김씨의 혐의 대부분을 유죄로 판단하면서도 일부 부당이득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단, 김씨에게 징역 5년과 벌금 3억원을 선고했다. 2심은 김씨의 업무상 배임 혐의 일부를 무죄로 판단했지만, 형량은 1심과 동일하게 유지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원심의 판단을 그대로 따랐다. 주가조작 범죄로 초래된 피해 액수에 비해선 낮은 형량이었다.

한 기업M&A 전문 변호사는 “당시 재판부는 이 사건을 치밀한 계획 하에 이뤄진 조직적 경제 범죄로 정의하고 횡령 범죄에 대해서도 유죄를 선고했다”며 “다만 500억원대 사안에 양형기준상 최하한을 선고한 터라 많은 사람들의 비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국민의 사법 신뢰도 조사 등을 보면,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늘 꼴찌 수준”이라며 “사법부가 국가 이름으로 피해자들을 대신해 응보나 교화를 위한 형벌권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많이 배제돼 있는데, 이는 ‘봐주기 재판’에 대한 의구심을 좀처럼 떨치기 어려운 원인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지난 2022년 12월에도 대법원은 사채자금으로 코스닥 상장 게임개발사를 인수한 뒤 수백억 상당의 회삿돈을 횡령·배임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일당들에 대해 비교적 낮은 형량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바 있다. 이들의 범죄 패턴도 다르지 않다. 게임개발사의 주식과 경영권을 사채자금으로 인수하고 해당 주식을 사채업자에게 양도해 사실상 무자본으로 기업을 사들였다.

이 같은 무자본M&A 범죄에 가담한 인물 중에는 전직 구청장도 있었는데, 당시 자본시장법 위반 방조 혐의로 벌금 1000만원이 확정됐다. 이날 대법원은 총 12명의 피고인들 가운데 범죄에 가담한 사모펀드 임직원 등 일부에게 공모관계나 부정거래의 동기, 고의성 등에 관한 검찰의 혐의 입증이 부족하다며 1심보다 감형한 원심을 확정했다. 최종적으로 피고인 12명 중 6명이 무죄를 확정받았다.

투자 피해자들 사이에선 법원이 무자본M&A 등 자본시장범죄에 대해 낮은 형을 선고하는 것이 범죄를 근절시키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투자 피해를 본 한 소액주주는 “법 위반 전력이 많은 실질적인 ‘쩐주’는 뒤로 숨은 채 전과가 없거나 초범인 이른바 ‘바지’를 주가조작 기업 경영진에 앉혀 쩐주들은 법망을 피해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법원의 형 선고가 낮은 것은 동종 범죄 재범율을 높이는 원인이 된다. 법조계에선 주가조작범 4명 중 1명이 다시 범죄를 저지른다는 통계도 있다. 실제로 헤럴드경제가 입수한 무자본M&A 범죄자의 형사 판결문에 따르면, 한 기업사냥꾼 A씨는 십수년간 코스닥 상장사를 인수한 뒤 공범들과 함께 회사자금을 횡령해 소액주주 등에게 대규모 손실을 입힌 전력 등이 확인됐다.

특히 A씨는 여러 코스닥 상장사를 상장폐지하는 데 개입했던 전력도 있었다. 무죄를 선고받은 판결을 제외하더라도 동종 범죄 전력이 최소 6회 이상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여러 사건에서 사기 및 횡령 등 혐의로 기소됐는데, 2012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을 확정받는 등 동종 범죄로 여러 차례 실형을 받기도 했다.

앞서 기업M&A 전문 변호사는 “미국과 같은 플리바게닝(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증언하는 대가로 검찰 측이 형을 낮추거나 가벼운 죄목으로 다루기로 거래하는 것)제도를 전격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면 주가조작 세력의 쩐주는 드러나기가 정말 어렵다”며 “가끔씩 혐의가 명백하게 드러나 단독으로 유죄 판결이 나기도 하는데, 이렇게까지 드러나는 건 속된 말로 ‘얼빵한 쩐주’라 봐야 할 정도로 거의 드물다”고 설명했다.

부장검사 출신 한 로펌 변호사는 이 같은 솜방망이 처벌 경향에 대해 “무자본M&A를 악용한 주가조작 범죄는 돈을 편취하려 주가를 부양해 악의적으로 엑시트하겠다는 고의성을 입증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다”며 “인과관계 인정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아 중형이 나오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부당이득이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일 경우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부당이득이 50억원 이상인 경우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가중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그간 공범 관계로 이뤄진 주가조작 범죄의 특성상 각각의 부당이득액 산정 기준이 불명확해 중형이 선고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처럼 형사처벌까지 장기간 소요되고, 효과적 제재 수단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지난해 6월에는 자본시장법이 개정됐다. 올해 1월부터 시행된 개정 자본시장법에는 부당이득 산정방식이 법제화되고 부당이득의 최대 2배를 환수하는 과징금 제재가 신설돼 경제적 처벌 근거가 강화됐다.

특히 부당이득 산정기준을 명확히 한 점은 법안 개정의 의미다. 새 법에 따르면 부당이득은 법 위반행위로 얻은 총 수입에서 총 비용을 뺀 차액으로 규정된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개정 자본시장법은 시행 된지 5개월 가량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 새 자본시장법에 의율돼 구체적인 형사 판결이 선고된 사례는 없다.

정준혁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무자본M&A 악용 범죄를 비롯한 자본시장 불공정행위 이슈에는 그동안 주가에 미친 영향, 즉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얼마나 입혔는지 등에 관한 입증을 하기에 복잡한 부분이 있었다”며 “지난해 자본시장법이 개정되면서 시행령에 부당이득 산정기준이 포함돼 전반적으로 자본시장 관련 범죄에 대한 사후적 규제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다만 “무자본M&A 범죄의 억제 효과를 위해선 의무공개매수 제도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대법원 양형기준상 증권 범죄의 경우 가중처벌을 한다고 해도 최대 징역 15년까지만 선고할 수 있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 여론에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최근 사기 범죄에 관한 양형기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yk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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