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그날 우리는 서로가 무척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다”…36년 기다린 만남[우리사회 레버넌트]
뉴스종합| 2024-06-28 14:33
[우리사회 레버넌트]

‘바닥’에서 ‘반전’은 시작됩니다. 고비에서 발견한 깨달음, 끝이라 생각했을 때 찾아온 기회. 삶의 바닥을 전환점 삼아 멋진 반전을 이뤄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위기를 겪고 있다면, 레버넌트(revenant·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반전의 실마리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1988년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네덜란드로 입양됐던 수잔 씨는 지난 5월 중랑경찰서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친엄마를 만났다. 이들은 36년 만에 서로를 껴안았다.[사진=Suzanne Van Kooij 제공]

[헤럴드경제=이용경 기자] 네덜란드 입양인 수잔(Suzanne Van Kooij·수잔너 판 꼬이)은 생일을 하루 앞둔 지난 5월 20일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수잔, 어머니를 찾았어요.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수잔은 믿기지 않았다. 그토록 보고 싶고, 만나고 싶던 엄마를 찾았다니. 별안간 극도의 긴장감이 들었다. 경찰이 찾았다는 친엄마와의 만남 일정은 6일 뒤로 잡혔다. 수잔은 전화를 받은 그 순간부터 재회 직전까지 혹여 ‘엄마가 마음을 돌려 안 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을까. 그녀는 다시 그 순간을 회상했다.

“엄마를 만난 첫 순간에는 솔직히 혼란스러웠어요. 하지만 엄마와 테이블에 앉아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고, 우리는 서로가 무척 닮았다는 사실을 알았죠.”

수잔은 그 순간 엄마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큰 위로가 됐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엄마를 만나 꼭 끌어안던 그때의 순간을 두고 “지금껏 인생에서 꿈꿔왔던 전부였다”고 했다.

기억되지 않는 이별=수잔은 네덜란드 입양인이다.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인 1988년 5월 21일 경기도 평택시에서 정순진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러다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한국을 떠나 네덜란드의 한 가정으로 입양됐다. 수잔의 이야기는 그녀의 기억 속에 이미 남아 있지 않은 어느 순간에서부터 시작된다. 생애 첫 순간에 어머니와의 이별을 경험했지만, 그 이별의 흔적은 여전히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었을 터였다.

“네덜란드에 계신 부모님에게 입양됐을 때 태어난 지 겨우 4개월이었어요. 그때의 기억은 전혀 없어요. 다만 아기였을 때 친엄마와 분리되는 것이 ‘트라우마’라는 것을, 이 트라우마의 영향이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뿌리와 맞닿은 나라=네덜란드에서 성장한 수잔은 18살 무렵 네덜란드 엄마와 함께 뿌리를 찾는 여정에 나서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다른 입양인 동료, 가족들과 함께 단체로 찾았던 당시 여행에서 한국은 수잔의 눈에 자신의 뿌리와 맞닿은 놀랍고도 특별한 나라였다. 그녀는 “그 당시 여행은 2주밖에 되지 않아 너무 짧았다”며 “여행 이후에 더 오랫동안 한국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흘러 수잔은 좋은 기회로 건국대학교에서 6개월 간 교환학생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경험은 수잔이 엄마를 찾겠다는 결심을 한 본격적인 계기가 됐다.

나의 엄마를 찾아서=수잔은 2010년 건국대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찾아 자신을 낳아 준 엄마를 찾으려 했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고 했다. 교환학생으로 온 한 학기 내내 엄마를 찾았어도 역부족이었다. 한국에 머물게 된 시간은 예정보다 길어졌다. 그녀는 한국사회봉사회(Korea Social Service·KSS)에 친엄마를 찾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엄마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알았을 뿐 그 이상의 연락처를 알지는 못했다고 한다. 어렵사리 연락처를 찾더라도 ‘사용하지 않는 번호’였다.

그래도 수잔은 포기할 수 없었다. 수잔은 “한국사회봉사회가 2021년에 아동권리보장원(NCRC)으로부터 엄마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소를 받았지만 실패했다”며 “이는 나를 막다른 길로 이끌었다”고 회상했다. 2022년에 이르러 수잔도 누군가의 엄마가 됐다. 엄마가 된 수잔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시도하겠다는 생각으로 한국행을 결심했다.

엄마와 만남 가능케 해준 고마운 사람들=수잔은 엄마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2023년에도, 올해도 그녀는 엄마를 찾기 위해 한국과 네덜란드를 오갔다. 한국사회봉사회와 아동권리보장원을 통한 엄마 찾기에는 개인정보보호정책상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녀는 한 달간 휴가를 내고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리고 지난 5월 14일 경찰에 엄마의 소재 파악을 요청했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지는 걸까. 중랑경찰서 실종전담수사팀은 6일 만에 수잔의 엄마를 찾았다.

수잔은 “중랑경찰서 담당자들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 특히 내 요청을 진심으로 받아준 두 명의 경찰관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그분들이 없었다면, 엄마를 찾는 데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그녀는 또한 한국과 네덜란드 사이에서 입양인 가족찾기 일을 13년간 이어가고 있는 네덜란드 가톨릭방송국 류동익 한국특파원에게도 “한국에서의 각종 서류 작업 등을 도와줬다”며 특별한 감사 메시지를 전했다.

수잔 씨가 남편, 자녀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당시 모습 [Suzanne Van Kooij 제공]

인생의 터닝포인트 된 만남=수잔은 경찰의 전화를 받은 지 6일 뒤 엄마를 만났다. 36년 만에 피가 섞인 두 모녀의 만남이 그렇게 이뤄졌다. 그들은 혼란스러웠으나 이내 서로를 껴안았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엄마와 껴안을 때 나는 내가 꿈꿔왔던 모든 걸 다 이뤘다고 생각했어요. 꿈으로만 꾸던 엄마와의 만남은 마침내 현실이 됐고, 솔직히 나는 아직도 당시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예요.”

수잔은 엄마와의 만남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말했다. 특히 그녀는 “이제는 엄마를 찾는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감정과 질문으로 가득 찬 인생의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는 걸 깨닫고 있다”며 “이달 초에 다시 네덜란드에 돌아왔는데, 엄마와 며칠밖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고 했다.

현재 수잔은 네덜란드 정부부처에서 재무 분야 공무원이자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네덜란드로 귀국한 이후 업무에 곧바로 복귀했다는 그녀는 “한국에서의 모든 일이 너무 빨리 일어났다”며 “갑자기 두 명의 엄마가 생겼고, 두 세계 사이에 낀 느낌을 받는 데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와 동시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며 “엄마를 찾은 일은 내 인생의 여러 단계에서 치유가 됐다”고 덧붙였다.

엄마가 나를 포기한 이유=수잔은 36년 만에 만난 엄마를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수잔은 그 자리에서 엄마가 ‘그녀를 포기했던 이유’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수잔은 오히려 엄마의 말을 듣고 누구보다 마음 아파했다.

“미혼모들이 안 좋은 사람으로 비춰졌고 또 비춰지고 있다는 사실이 슬펐습니다. 미혼모들이 사회나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그들을 위한 지원도 없었다는 것이 비극적이라 느껴졌어요. 비록 엄마는 나를 법적 동의 하에 포기했지만, 그 누구도 당시 우리 엄마가 느꼈을 기분을 말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해요. 엄마는 임신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고, 병원에서 출산한 뒤 나를 포기하기 위해 전주에서 평택시까지 혼자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 이후로 엄마는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갔지만, 나는 엄마가 이 모든 일을 혼자 겪어야 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마음이 아픕니다.”

어려움에 처했다면 과감히 도움을 청하라=친엄마를 만난 수잔은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한국과 네덜란드를 더 자주 오갈 수 있도록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솔직한 마음도 드러냈다. 엄마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로 돌아오기 직전 한국에서 엄마가 팔을 다치셨어요. 그 상황에서 엄마를 떠나야 한다는 게 정말 슬펐어요. 엄마는 강한 여성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너무 많이 걱정됩니다.”

한국인과 네덜란드인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진 수잔. 그녀는 엄마와 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저는 제 두 가지 정체성을 모두 받아들여요. 하지만 한국어를 하지 못해 엄마와 대화 나누는 게 어려워요. 번역기를 사용한다 해도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죠. 엄마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수잔은 엄마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서로를 이해하고자 오는 10월 다시 한 번 한국에 올 계획이라고 말했다. 특히 수잔은 이중국적 취득까지 고려했다.

“네덜란드와 한국 시민권을 모두 갖게 되면 멋질 것 같아요. 바라건대, 매년 엄마를 보기 위해 한국을 놀러 올 수 있고, 엄마도 네덜란드로 한 번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헤럴드경제는 끝으로 수잔에게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이 담긴 조언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수잔은 이렇게 말했다.

“포기하지 마세요! 제게 이번 한국에서의 여정은 무언가를 믿을 때 그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진정 보여준 시간들이었어요. 여러분도 삶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도움을 구하고 과감히 그 길 너머를 보길 바랍니다.”

yk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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