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남대문시장에 뜬 금발의 구걸인…“러시아 돌아가면 전쟁터 끌려가”
뉴스종합| 2024-07-03 17:21
지난 1일 남대문시장 한 어귀에서 만난 러시아인 바딤(30). 베트남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다 비자 만료로 출국했으나 모국인 러시아 대신 한국에 임시 착륙해 구걸로 돈을 벌고 있었다. 김민지 수습기자.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김민지 수습기자] 일주일 가량 남대문시장에 출몰하고 있는 금발의 백인 구걸인이 시장 상인과 손님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목격담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가 종식된 만큼 외국인 베그패커(begpacker·구걸하는 배낭여행자)도 귀환한 것인지 관심이 모인다.

지난 1일 오후 4시께 찾은 남대문 시장에서 어렵지 않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바딤(Vadim)이라는 이름의 이 남성은 자신은 러시아 국적의 서른살 남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시장 한 구석에 자그맣게 자리를 깔고 앉아 “한국은 나에게 비싸다. 돈이 부족해요”라고 한글로 적힌 팻말과 수금통을 앞에 둔 영락없는 ‘구걸 거지’였다. 수금통에는 만원, 오만원권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천원짜리 지폐와 동전은 어느 정도 쌓여있었다. 팻말은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적었다고 했다.

바딤의 목표 수금액은 홍콩행 비행기표를 살 만큼의 돈이다.

왜 한국에 와서 구걸을 하느냐고 묻자 “나는 2주 전까지 베트남에서 영어를 가르친 선생님이었다”며 “하지만 학원 계약과 비자가 만료돼 베트남을 떠나야 했고, 한국행 비행기표가 싸길래 이리로 넘어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홍콩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고 영어가 잘 통한다”고 다음 목적지로 점찍은 이유를 설명했다.

모국인 러시아로는 절대 돌아갈 수가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남대문 시장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로 자리에 앉아 구걸행위를 하고 있는 바딤의 모습이 보인다. 김민지 기자.

바딤은 “지금 러시아로 돌아가면 필히 징집된다. 나는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는 대신 학생들과 있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표현하듯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베트남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자기 사진을 연신 보여줬다.

바딤처럼 서양인 외국인이 길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모습은 과거에도 관광지와 큰 시장 등지에서 종종 볼 수 있던 광경이다. 지난 몇년동안은 코로나19로 국가간 왕래가 줄어들면서 한동안 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만 구걸행위는 현행법상 명백한 위법 행위이기 때문에 바딤도 신고가 들어가면 범칙금을 물어야 할 수 있다. 2013년 개정된 경범죄처벌법상 국적에 상관없이 구걸 행위를 하면 최대 10만원의 범칙금이 부과된다. 인근 지구대 경찰은 “아직까지 (바딤에 대한)신고가 들어오진 않았는데 실무상 2번 이상 신고가 들어오고, 인근 통행에 지장이 생기는 등 피해가 명백하면 입건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취업비자가 없는 외국인이 영리행위를 하는 것은 불법이기에 바딤은 출입국관리법도 위반하는 셈이다.

이처럼 바딤은 존재 자체가 ‘불법’이지만 예상외로 주변 상인들 시선은 마냥 따갑지만은 않았다. ‘시장 미관을 해친다’, ‘다른 돈 쓰러 온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한국 이미지가 안 좋아진다’며 비판하는 상인도 있었지만 일부 남대문 상인들은 “노점상처럼 물건을 팔면 몰라도 그냥 돈 달라는 걸로 처벌하는 건 불쌍하다. 오죽하면 저러겠냐”며 동정하기도 했다.

법조계에서도 구걸 행위를 경범죄에 포함하는 경범죄처벌법을 두고 의견이 나뉘는 측면이 있다.

십여년 전 경범죄처벌법 개정 당시 ‘구걸의 범죄화’에 반대 입장을 고수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는 현재도 “단체 입장에서 후원금이나 기부금처럼 세련되게 돈을 달라고 하면 괜찮고 개인이 너무 빈곤해서 필요로 돈을 달라고 하는 걸 범죄로 규정하는 건 문제”라고 밝혔다.

반면 임경숙 법무법인 산우 변호사는 “구걸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빈곤을 논하는 것과 다른 차원이다. 악용하고 범죄 소지가 있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라고 단속을 통한 범죄 예방의 순기능을 강조했다.

청주대 법학과 조병선 교수도 “오히려 경찰이 계도할 시간을 주기에 인권 탄압과는 거리가 멀다“고 밝혔다.

한편, 우리나라보다 베그패커의 역사가 길고, 성행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서양인들이 거짓 사연으로 구걸하며 현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례가 잇따르자 단속 강화에 나섰다.

태국에서는 현장 체포를 위한 정기적인 단속을 시작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베그패커로 의심되는 관광객에게 체류 기간과 그에 맞는 충분한 현금이 있는지 입증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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