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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뿌린듯 ‘숨막히게 하얀 그곳’에서 만난 이효석
라이프| 2024-08-27 11:24
가을을 여는 ‘메밀꽃 문학 축제’평창효석문화제 기간 중 볼 수 있는 거리상황극

강원 평창군 봉평면에 가면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집을 두 가지 방식으로 만날 수 있다.

한 곳은 마당 끝 줄에서 코스모스, 백일홍, 해바라기 등이 미소짓고, 벽에는 농기구가 기대 서 있다. 초가 지붕 아래 마루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정담을 나눌 수도 있다. 이곳은 작가가 태어나 성장기를 지낸 생가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100m 가량 떨어진 효석달빛언덕 한 켠에는 유럽식 주택이 있다. 그가 평양에서 살던 서양식 집 모습이 재현돼 있는 것이다. 이곳은 축음기, 레코드판, 작가가 좋아한 쇼팽 사진, 타자기, 풍금, 커피잔 세트 등으로 장식돼 있다.

두 집을 내려다 보는 이효석문학관은 평양에서 맞은 어느 성탄절, 서재의 모습을 복원했다. 당대 유럽 최고의 여배우, 프랑스의 다니엘 다리유 사진 아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했다. 1907년생 촌사람이 유럽 문화라니.... 가산 이효석은 당대 ‘신(新) 남성’이었다.

이효석 작가의 동상

‘깡촌 사람’ 이효석이 유럽을 탐했던 이유

봉평 들에는 메밀꽃이, 평창강변에는 백일홍이 피고, 해발 1200m 미탄면 육백마지기 고원에서 산나물 캐기, 밭농사가 이뤄지던 평창은 강원도 내에서도 벽촌 중 벽촌이었다. 그곳에서 성장한 그가 신(新)문물로 치장한 ‘개화 신사’를 넘어, 유럽 문화의 속살까지 파고든 점은 이채롭다.

메밀밭이 사방을 에워싼 이효석문학관의 카페 ‘동(DON)’은 그가 함북 경성(鏡城)에서 자주 들러 모카커피를 마시던 찻집과 같은 이름이다.

당시 그가 경성에 체류한 이유는 유럽 갈 형편이 못돼 ‘동방의 파리’로 불리던 하얼빈이라도 갈까 싶어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머무른 것이다. 또 러시아 왕족이나 귀족 일부가 휴양지로 삼던 곳이어서 유럽의 생활문화를 관찰하기 좋았다. 그는 인근 청진항에서 미국 재즈가수 공연이 열릴 때에는 열 일을 제치고 달려갔다고 한다.

이효석은 동서 문화의 폭 넓은 체험을 통해 획일화된 일제 문화로부터 탈피하려 했고, 봉평. 유럽, 메밀, 커피 등을 모두 문학적 영감을 얻는 재료로 삼았다.

시·소설 장르의 융합적 미학도 추구했음은 ‘메밀꽃 필 무렵’의 구절에서 잘 나타난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즘생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왼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얗다.’ 마치 풍경화 한 폭으로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를 보는 듯,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효석 작가가 나고 자란 평창군 봉평면 이효석생가

9월, 평창서 즐기는 효석문화제·백일홍축제

메밀꽃의 수수한 아름다움에 취하고 ‘이효석 인문학’을 즐기는 평창효석문화제가 오는 9월 6~15일 봉평면 효석문화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행사에서는 문학마당·전통마당·자연마당으로 구성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과 문학을 넘어 예술, 정치, 음악, 코미디 등 다양한 분야의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효석달빛언덕은 재현된 유럽풍으로 꾸며진 작가의 집(푸른집·이효석문학체험관) 외에 근대문학체험관, 나귀광장·수공간, 테마형 경관, 효석광장 등으로 꾸며져 있다.

축제의 압권은 단연 메밀꽃밭이다. 꽃길을 걷고, 소설 속 주인공 허생원과 동이처럼 나귀 타는 체험도 할 수 있다.

효석문화제가 끝날 무렵인 오는 9월 13~22일 평창강 둔치에서는 1000만 송이 백일홍이 청정강물과 하모니를 이루는 평창백일홍축제가 열린다. 백일홍 외에 코스모스, 해바라기, 넝쿨식물, 대왕참나무숲길이 조성된다. 버스킹, 예술제, MBC 가요제, 한가위 노래자랑 등도 펼쳐진다.

평창 남부 미탄의 고원 육백마지기는 과거 산촌의 애환이 묻어난 곳으로 지금의 ‘텔레토비 동산’같은 풍력 발전기 아래 백두대간 산자락을 굽어보며 자연을 호흡하려는 ‘차박족’의 성지가 됐다. 산 기슭에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촬영지가 있다.

단종이 갇혀 있던 영월군 청령포

“절경이라 더 서러운”단종 유배지 청령포

평창 오대산에서 발원한 동강은 미탄을 거쳐, 이 강줄기의 최고 비경으로 꼽히는 강원 영월군 어라연으로 이어진다. 영월-평창은 충북 제천-단양, 경북 영주-봉화와 ‘중부내륙중심권 협력체’를 결성, 관광·경제 등 전방위적 상생을 도모하고 있다.

동강이 남한강과 합수돼 서울로 향하는 초입(영월식 표현은 서강 초입)에 물길이 한바탕 크게 휘돌아나가는 절경지대가 있는데, 바로 조선 단종이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세조)의 ‘쿠데타’ 계유정난으로 갇혔던 청령포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애달프다)’라는 시조의 무대이다. 왕방연이 호송 금부도사로서 지은 시라고 알려져 있지만, 영월 향토사학자 사이에서는 왕방연이 사람 이름이 아니라 후대에 붙여진 ‘시조의 제목(일국의 왕이 강물에 흐르다)’이라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배를 타고 청령포 안으로 들어가면 소박한 기와집으로 복원된 단종어소(端宗御所) 주변의 솔숲이 아름답다. 천연기념물 관음송이 왕 나무가 되어 거느리는 이 숲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관음송은 이곳에 홀로 억류된 단종이 부인 정순왕후 생각에 감정이 북받치면 “내가 이럴려고 왕이 되었던가”라고 한탄하며 부여잡았던 나무라고 한다. 단종을 추모하는 ‘관음송 돌이’행렬이 이어졌고, 숙종-영조-정조 때 완전히 복권된 후 어느 때부터인가 억울한 일의 사필귀정, 소원 빌기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관음송 돌이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해야 한다.

단종은 청령포에 있다가 영월부 관아 관풍헌으로 옮겨진뒤 1457년 수양대군으로부터 사약을 받았으나 거부하다 관원들에 의해 피살됐다. 그가 조부 세종과 부친 문종의 DNA를 이어 성군이 됐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영월군 요선암

단종 무덤 장릉·요선암·선돌 등 ‘볼거리’풍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영월 장릉은 단종이 묻힌 곳이다. 흔히 왕릉의 구조는 홍살문을 지나 어도-정자각-능까지 일직선이어야 하지만, 영월 장릉은 ‘ㄱ’자로 꺾여 있고 다른 능에 비해 작다. 능은 정자각에서 바로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곳에 있고, 정자각과는 수직으로 배치된 기형적 구조다. 그 이유는 영월 지역 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급히 수습, 가매장한 곳을 왕릉 격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이곳을 방문하면 정자각에서 왕에 대한 제례법을 배우고, 조선 역사 최초로 국모가 노비로 강등된 정순왕후-단종 부부의 조형물 앞 연못에서 수련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한다.

능으로 가려면 홍살문을 다시 나와야 한다. 젯밥을 준비하는 재실 근처에서 다시 등산하듯 언덕 위로 올라 능 앞에서 다시 재배(再拜)한다. 조선의 어느 왕릉보다도 가슴 시린 산책을 하게 되는 곳이다.

영월군 젊은달와이파크

이밖에도 영월에는 무릉도원면에 있는 신비한 지질 요선암과 요선정, 매년 10월 동강 둔치에 피는 붉은 메밀꽃밭, MZ세대 핫플레이스인 미술관 젊은달와이파크, 제작 기간 6억~3억년으로 추정되는 고생대 지질 작품 선돌, 별마로천문대, 올챙이국수와 배추전으로 유명한 영월서부시장 등 여행할 만한 곳들이 많다.

인구 3만7000여 명(올해 7월 기준)의 영월에는 무려 28개의 미술관·박물관이 있다. 폭염에서 해방된 여행자에게 높은 ‘가심비’를 제공하는 소도시라 할 만 하다.

평창·영월=함영훈 기자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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