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전쟁보다 짜릿 혼돈의 인간군상 ‘전,란’
라이프| 2024-10-10 11:05
말을 타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는 천영. 왜군은 ‘청의 검신’이란 별명을 붙였다. [넷플릭스 제공]

2시간 여 러닝타임 중 액션신이 나올 때가 오히려 잠깐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대화를 주고받을 때가 더 긴박하다. 넷플릭스 영화 ‘전,란’은 ‘액션’과 ‘전쟁’ 장면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러운 임진왜란의 시기,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을 탐구하는 ‘드라마적 장면’에 더 몰입이 된다. 영화의 제목을 ‘전(戰)’과 ‘란(亂)’ 사이에 ‘쉼표’를 넣어 끊었는데, 전쟁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신분제가 흔들리는 혼돈을 담아내려는 제작자의 의도다.

오는 11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전,란’은 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 함께 자란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와 그의 몸종 천영이 선조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으로 적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작품으로서는 처음으로 지난 2일 개막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작품에선 최종 빌런이 언뜻 보면 조선인의 코를 베는 일본 장수 ‘비귀(겐신·정성일 분)’인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조선 백성의 어버이인 임금, 선조(차승원 분)가 더 큰 분노를 일으킨다.

여느 영화에서처럼 ‘무겁고 비장한 조선 임금 캐릭터’가 나오겠거니 싶었지만, 사실 오산이다. 말을 타고 피난길에 오른 선조는 가마를 타고 뒤따라 오던 중전이 가마 밖으로 튕겨져 나오자 “그러게 말을 타라니까”라며 이죽거린다. 불타는 경복궁을 내려다 보면서는 세상 경박한 말투로 “저게~ 뭐야”라고 묻는다. 피난길에 받은 수라상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나 전쟁 직후 경복궁을 600칸이 아닌 6000칸으로 새로 짓자고 박박 우길 때에는 그의 명치를 세게 치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

열등감과 질투에 휩싸인 선조가 구국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 살아서 돌아오길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란’에는 수군 대신 내륙에서 왜구에 맞서 싸운 의병들을 통솔한 김자령 장군(진선규 분)이 등장하는데, 전쟁이 끝나고 김자령이 도성에 도착하자 선조는 “순신은 죽었는데 자령은 왜 살아있는가”라며 역사가 공인한 소인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물의 구도가 대체로 선과 악으로 선명하게 나뉘지만, 이종려(박정민 분)는 다소 불분명하다. 초반에는 노비이자 동무인 천영(강동원 분)을 정말로 아끼고 안쓰럽게 여기는 세상물정 모르는 양반 도련님이었다가 피난길 도중 식솔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엔 살기어린 눈빛을 장착한다. 극중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라 할만 하다.

‘전,란’은 원 톱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강동원이 연기한 천영이 굳이 꼽자면 프로타고니스트(주도하는 자) 주인공이다. 천영은 양민이었지만 궁핍한 부모로 인해 노비로 전락한 인물로, 면천해 다시 양민으로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하지만 아버지, 김자령, 의병 동지들을 차례로 잃으며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일며 그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린다.

강동원은 최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전,란’ 기자회견에서 “천영을 연기하면서 처음으로 노비 역할을 맡아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동원이 연기한 천영은 그냥 노비라기 보다 한 번만 봐도 남의 검법을 제 것으로 체화하고, 왜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천영은 내내 입고 있는 청의 때문에 ‘청(靑)의 검신’이라 불린다. 노비 역을 해도 멋진 강동원이라 오히려 신선함은 다소 반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강동원·박정민·정성일, 세 배우가 서로가 서로를 베고자 해무 짙게 깔린 해변에서 싸우는 액션신은 압권이다. 롱테이크로 찍힌 이 장면은 잘 만들어진 액션신이긴 하지만, 배경음악처럼 이어지는 그들의 한갓진 농을 듣다보면 긴장감은 다소 덜하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아쉬움은 이 영화를 다시 스크린에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의병 범동을 연기한 김신록은 부산국제영화제 ‘전,란’ 회견에서 “넷플릭스 영화로 전세계 190개국에 오픈된다고 들었다. 여러 나라에서 우리 영화를 사랑해주면 이게 스크린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며 “넷플릭스 영화 뿐만 아니라 극장에 걸리는 영화도 활력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민경 기자

thin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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