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비 분담금과 보편관세 등 새롭게 날아올 ‘청구서’를 고민하고 있는 한국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사업 제안서부터 들이밀었다. 당선 확정 첫날 윤석열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한국 조선업을 콕 집어 양국간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밝힌 것이다. 보통 당선 축하와 감사 인사, 양국간 포괄적인 우호 증진 다짐 등 덕담 위주의 대화를 주고 받는 관례상 특정 의제가 튀어나온 건 뜻밖이다. 뼛속까지 비즈니스맨이라는 평을 받는 트럼프 당선인의 거래 본능이 무서울 정도다. 앞으로 4년 간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상대해야 할 우리에겐 여러모로 함의하는 바가 크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의 브리핑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은 7일(미국시간 6일) 약 12분간 이뤄진 윤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한국의 세계적인 군함과 선박 건조 능력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 선박 수출뿐만 아니라 보수·수리·정비 분야에 있어서도 긴밀하게 한국과 협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 분야에 대해 앞으로 구체적으로 윤 대통령과 이야기를 이어가길 원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당선인이 ‘미국의 조선업이 많이 퇴조했는데 한국과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말씀했다”며 “그래서 ‘우리도 미국의 경제와 안보를 위한 일이기 때문에 적극 참여하려고 한다’고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트럼프의 조선업 협력 제안은 미국 우선주의·보호무역 강화를 핵심으로 하는 ‘트럼프노믹스’가 우리에겐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 이날 국내 조선·방산업체 주가가 크게 올랐다. 트럼프 당선인 발언이 미 함정 건조와 정비·수리·운영(MRO)을 한국 조선업체에 맡기겠다는 의미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특히 미 군함 MRO 시장은 20조원 규모로 평가된다. 미국은 조선업이 사실상 붕괴되면서 군함 건조는 물론이고 MRO에서도 크게 애를 먹을 정도로 해군력이 저하돼 중국과의 해양 패권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크다.
트럼프는 윤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미국이 도모하는 군사·경제적 이익을 서슴없이,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이는 미국 차기 정부의 대외정책이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가치’ 중심 연대·동맹 노선에서 자국의 ‘이해’(利害)을 최우선으로 하는 협상과 거래전략으로 전환될 것임을 시사하고도 남는다. 트럼프가 취임 첫날부터 서명할 행정명령이 이미 300개 정도 준비됐다고 하는데, 윤 대통령과의 통화는 그가 다른 나라에 내밀 청구·제안서 목록도 이미 준비 완료됐음을 보여준다. 트럼프의 ‘거래의 기술’에 대처해 국익을 극대화하려면 정부의 노력이 배가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