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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타타라타] ‘메르시 주세혁’에 대한 기억과 카톡 하나
뉴스| 2015-05-0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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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그럴진대 외국여행 중 지갑을 잃어버리면 참 당혹스럽다. 그 낭패감이란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2003년 5월 파리에서 그랬다. 탁구 세계선수권 취재 차 파리에 있었는데, 친분이 있던 ‘국민마라토너’ 이봉주가 파리로 왔다. 그해 여름 파리에서 열릴 세계선수권에 출전하는데 답사하러 온 것이었다. 반가움에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탁구 취재를 마치고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이봉주가 머무는 호텔로 향했다.

#프랑스 사람들, 아니 최소한 그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영어를 참 못했다. 여기에 지금처럼 내비게이션도 없고, 파리의 호텔이라는 게 한국과는 달리 같은 이름을 가진 호텔이 도시 곳곳에 산재했다. 그러니 길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파리지도, 주소가 적힌 메모 등 온갖 것을 꺼내놓고 기사와 머리를 맞댔지만 목적지 근처에서 빙빙 돌았다. 결국은 택시가 호텔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국민마라토너’가 조금은 먼 거리를 달려와 택시를 찾는 것으로 만남이 성사됐다. 이럴 때 마라토너가 참 유용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만 택시에 지갑을 놓고 내렸다. 영수증까지 받아놓고 말이다. 심지어 택시에서 내려 이봉주와 인사를 나눈 직후 ‘참 빨리도’ 지갑분실을 깨달았다. 영수증을 넣을 지갑이 없었던 것이다. 택시만 좇아가면 되는 상황. 하지만 이번엔 국민마라토너도 안 통했다. 부랴부랴 이봉주가 택시의 꽁무니를 따라갔지만 사람이 차를 이길 수는 없었다. 다행히 영수증을 챙겼기에 급히 연락을 취하면 지갑을 찾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봉주의 통역을 통해 택시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금요일 밤이라 이미 모두들 퇴근해 전화가 닿지 않았다. 혹시나 다른 승객이 지갑을 가져갔다면 ‘영어를 참 못하는 그 택시기사’와 연락이 돼도 소용이 없을 터. 급한 마음에 경찰서까지 찾아갔는데, 이건 무슨 경우인가. 경찰들이 피켓을 들고 로비를 돌고 있엇다. 파업 중이라고 했다. 어렵게 유일하게 일하는 여자경찰관을 찾아 물었더니 ‘도난이 아닌 분실이기에 도움을 줄 수가 없다’고 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정말이지 세계 최고의 관광도시라는 파리가 미워졌다. 장기출장으로 현금도 유로화로 수백 만 원이나 있었고, 신용카드도 서너 장이 있었다. 한국은 새벽시간이었지만 잠자는 아내를 깨워 카드정지부터 부탁했다. 파리는 유럽에서 로마와 함께 소매치기와 좀도둑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택시회사에 연락해 ‘영어를 못하면서도 불어를 못하는 승객을 나무란 그 택시기사’에게 확인을 했다. 물론 내가 탄 뒷자리에는 지갑은 못 봤다고 했다. 길찾느라고 싸움직전까지 갔던 까닭에 지갑을 찾았는데 못 봤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포기했다. 전날 지갑을 잃은 슬픔에 국민마라토너의 위로를 받으면 술을 먹었기에 몸도 몹시 피곤했다. 돈도 없고, 한국 탁구선수들도 대부분 토너먼트에서 탈락한 까닭에 주말은 그냥 호텔방에서 컵라면이나 먹으면서 조용히 인생에 대해 생각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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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혁의 카카오톡 이미지. '쇼는 계속 된다'는 영문 글귀가 적혀 있다.

#그런데 오상은 유승민 등 유명한 선수도 아닌 23살짜리 상무선수 하나가 남자단식에서 예상을 깨고 순항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왔다. 솔직히 ‘공적 기쁨’보다는 ‘개인적 고통’이 더 심했기에 일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마저도 나를 괴롭혔다. 어쨌든 8강에서 강력한 우승후보 마린을 꺾은 주세혁은 이날 4강을 넘어 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결승은 일요일 대회 최종일의 마지막 경기였다. 덕분에 파리관광도 못 하고 일요일 가장 늦은 시간까지 탁구장에서 일을 하게 됐다. 이왕 고생하는 것 이미 결승진출로 남자단식 사상 한국의 세계선수권 최고성적을 낸 주세혁이 우승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오스트리아의 쉴라거에게 패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파리와는 참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 오전 탁구대표팀 선수단과 함께 낮에 간단한 파리관광을 한 후 저녁비행기로 귀국하기 위해 드골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지랖이 넓기로 유명한 ooo감독의 핸드폰이 울리더니, 조금 있다가 망신스럽게도 “유 기자, 지갑을 잃어버렸어?”라고 물어왔다. 창피해서 탁구 쪽에는 얘기도 안 했는데 대표선수들이 모두 동석한 버스에서 그렇게 물어오니 완전 망신이었다. 어쨌든 내용은 ‘모 언론사의 파리특파원인데,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한 프랑스 아줌마가 택시에서 지갑을 주었는데 그게 한국에서 취재온 기자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기적에 가깝다. 보봐리 부인이 금요일 저녁 택시에 지갑을 주었는데,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기자신분증으로는 도대체 주인을 찾을 길이 없었다고 했다. 주말이라 월요일에 경찰에 넘겨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요일 오후 우연히 TV로 탁구 남자단식 결승을 재미있게 봤단다. 한쪽이 한국선수(주세혁)였는데 가만 보니 지갑의 신분증에 영어로 KOREA와 PRESS가 적혀있었던 것이 떠올랐다고. JOO와 YOO, 라스트네임도 비슷한데 혹시 이 지갑을 잃어버리는 멍청한 아시안이 탁구를 취재하러온 한국의 기자인가? 보봐리 부인은 참 영특했다. 월요일에 한국대사관으로 전화를 했고, 대사관에서 특파원에게 연락했는데, 이 특파원이 OOO감독과 친구사이였던 것이다.

#조금 더 소설 같은 뒷얘기가 있지만 각설하고, 한 보름 뒤 국제우편을 통해 보봐리 부인으로부터 지갑을 돌려받았다. 앞서 사례비를 좀 주고 싶다고 했다가 “지갑 주인을 찾아주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내가 왜 당신 돈을 받느냐?”고 꾸지람을 했던 보바리 부인이었다. 그러니 지갑에는 국제우편발송비와 교통비(택시비)를 공제한 금액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오히려 ‘내가 지하철로 이동하면 되는데 감기가 들어 택시를 타고 우체국에 갔다. 그래서 교통비가 더 들었다. 이것이 아주 미안하다’는 사과의 메모가 들어있었다. 당초 그냥 대사관이나 한국특파원에게 지갑을 넘겨주면 알아서 찾아가겠다는 것을 부인은 “지갑에 돈이 많이 들어 있어서 안 된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ID번호(주민번호)를 대고, 또 내가 당신 사진을 보고 있으니 외모를 (영어로)설명하면 내가 믿겠다. 그리고 직접 내가 당신이 말하는 주소로 붙여주겠다”고 철두철미하게 나왔으니 웃음과 함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해 여름 다시 파리로 갔다. 이제는 파리가 좋아졌기 때문에 이봉주의 세계선수권 취재를 자원했다. 그리고 선물을 사서 보봐리 부인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부인은 남프랑스로 장기 바캉스를 떠나고 집에 있지 않았다. 이웃에게 선물만 전해달라고 부탁하고는 돌아왔다. 이것이 2003년 주세혁 덕분에 파리에서 잃어버린 지갑을, 서울에서 되찾은 스토리이다.

#지난 3일 2015 쑤저우 세계탁구선수권(개인전)이 끝났다. 12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한국선수 중 세계랭킹이 가장 높고, 이제는 역사에 남을 세계 최고의 수비수가 된 주세혁도 출전했다. 그리고 남자단식 16강에서 세계 1위 마롱에게 1-4로 져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개인전 세계선수권을 마쳤다. 짠했다. 만 35세로 나이가 많은 것은 물론이고, 희귀병인 류마티스성 베체트병(만성염증성 혈관질환)을 앓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성실히 선수생활을 해온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회 전 주세혁의 소속팀인 삼성생명탁구단의 최영일 감독은 “나이도 많고, 몸도 안 아픈 곳이 없을 거에요. 그래도 운동은 늘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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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주세혁과의 카톡. '게속 최선을 할게요'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서 문자를 넣었다. 12년 전 덕분에 파리에서 지갑을 찾은 추억도 떠올랐고, 개인적으로 생활체육으로 탁구를 즐기게 되면서 그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지 새삼 느끼고 있던 것이 동기가 됐다. 직업 상 참 많은 글을 쓰면서도 이럴 때 한 줄 쓰는 것은 참 힘들다. 고민 끝에 ‘(아직도)주세혁 경기를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고 보냈다. 그랬더니 이내 중국에서 답장이 왔다. ‘계속 최선을 할게요’라고. 이 8음절에 울컥했다. 솔직히 기자이기에 앞서 팬심으로 그의 경기를 조금은 더 보고 싶었다. 그의 은퇴가 가장 걱정이었는데 이 8음절에는 ‘내년 단체 세계선수권과 리우 올림픽에 출전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돼 있었던 것이다. 두 가지로 ‘메르시(불어로 감사하다)! 주세혁’이다. 오래전 당신의 탁구 덕에 지갑을 찾았고, 이제는 최소한 1년은 진귀한 수비탁구를 더 볼 수 있어서 말이다. [헤럴드스포츠=유병철 편집장 @ilnam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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